어쨌거나 써야만 하는 병에 걸린 게 분명하다. 혼자 남아 무언가 적을 수 있는 시간을 간절히 기다렸고 그게 바로 지금이다. 평소 좋아하는 자리에 앉아 오랜만에 빈 화면을 마주 본다. 그토록 쓰고 싶어 하지만 사실 쓸 만한 이야기가 있는 건 아니었다.
커피를 홀짝이며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는데 나로부터 네 칸 떨어진 자리에 한 사람이 와서 앉았다. 그는 주문한 커피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걸려오는 전화를 받아댔다. 저렇게 소란스럽게 받는 게 예의는 아니겠지만 지금 여기에 말하고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므로 오히려 활기찬 분위기가 되었다.
들으려고 한 건 아니지만 워낙 크게 떠들어댄 덕분에 통화에 관련된 사안을 대충 알 거 같다. 그가 기한 내에 맞출 수 없다고 한 일을 무리하게 진행시켜 타 지사에 전달했는데 결국 그의 예견대로 문제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제가 그럴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정말 죄송하지만 이미 제 손을 떠난 일이에요." 그는 긴 통화 중에 이런 말을 3번 정도 반복했다. 말과 달리 딱히 죄송해 보이지는 않았다. 수화기를 사이에 두고 보이지 않는 상급자에게 단호한 입장을 표명하는 동안 카페 안에는 계속 캐럴이 울려 퍼졌다.
그러고 보니 벌써 성탄절이 코 앞이다. 캐럴은 언제 들어도 설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위화감이 든다. 리듬에 맞춰 몸이라도 흔들어야 할 거 같은데 정작 여기 있는 이는 상대와 밀고 당기며 계속 말하기도 듣기도 불편한 거절 의사를 밝히고 있다.
통화가 끝나고 그가 자리에 앉아 식어버렸을 커피 한 모금을 들이키며 한숨을 쉰다. 그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생면부지의 나는 옆 자리에 앉아있단 이유로 '제 손을 떠난 일이에요.'를 세 번이나 덩달아 곱씹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열한 달, 340일의 시간이 내 손을 떠났다.
올해 첫날이 떠오른다. 작년 마지막 한 시간과 올해 첫 한 시간의 교점을 우리 가족에게 가장 소중한 방식으로 보내고 나서 늦은 새벽 맥도널드 드라이브 스루를 이용해 자동차 안에서 햄버거와 추로스를 먹었다. 밤늦은 시간에 좀처럼 외출할 일이 없기에 그 기억은 특별하다. 그 뒤로부터 어제까지 있었던 일들은 벌써 기억나지 않는 부분이 더 많다. 저 사람의 업무처럼 이번 해 일어났던 많은 일들이 이미 내 손을 떠났다.
주로 후회할 만큼 아쉬웠거나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좋았던 것들만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떤 순간은 솔직히 돌이키고 싶기도 하다. 내뱉은 말은 주어 담고 싶고, 들었던 말은 씻어내고 싶다. 썼던 글은 고치고 싶고, 만났던 사람은 차라리 모르던 때가 나았나 싶기도 하다.
그와 다르게 꼭 전해주어 다행인 말이 있었고 어떤 말은 듣고 나서 원인 모를 체증처럼 꽉 막혀있던 숨을 토해내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쓰지 않으면 고칠 수도 없으니 그래도 쓰길 잘했고,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행복을 몰랐을 사람도 여럿 만났으니 만나길 잘했다.
우리는 누구나 그렇게 산다. 손을 떠난 일이 되어버리기 전에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해보고 깊이 고민하고 아등바등 거리며 최선의 선택을 하려 애쓴다. 그리고 그 모든 게 무색해지도록 시간이 흐르면 대체로 그 선택을 후회하며 또 생각한다.
얼마 전 일이다. 일 년 반 동안 키우던 달팽이가 동면에 들어가더니 그대로 죽고 말았다. 달팽이를 키우던 집을 정리해야 했다. 안에 든 건 다 비워내고 집을 깨끗하게 씻는 일만 남겨두었다.
샤워기로 씻어내려다가 하필이면 안전 안내 문자가 생각났다. 요즘 우리가 사는 지역은 가뭄이다. 아이들도 물을 아껴가며 씻기려 노력하는데 생명도 남지 않은 달팽이 집을 씻어내는데 물을 쓰기엔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욕조에 담긴 비눗물을 바가지로 퍼 담아 씻어냈다.
달팽이가 살던 집에는 배발에서 나오는 미끌미끌한 액체만 남는데 눈에 보이지도 않는 이 흔적이 좀처럼 잘 닦이지 않았다. 밖에서는 엄마를 불러대고 할 일도 많이 남아있으므로 비눗물이 있는 욕조에 담가 불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깜빡 잊고야 만 것이다.
한참 뒤 화장실에 들어갔던 남편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애들이 씻는 곳에 이걸 넣으면 어떡해." 들어가서 확인해보니 욕조 물이 그새 다 빠져버리고 달팽이집에 남아있던 소량의 흙이 여기저기 묻어있었다.
모든 선택은 이런 식이다. 당장에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판단한 일인데 종국에는 미련한 선택이었다는 게 주로 타인에 의해 증명된다. 생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묻는다면 생각이 많다고 답하겠다.
그래도 또 묻는다면 생각이 당신과는 달랐다고 답할 수밖에. 분명 생각 끝에 내린 결론이었을 텐데 그 '결론의 결과'로 인해 다시 또 생각한다. 미처 거기까지 밖에 생각하지 못한 나 자신에 대한 생각 말이다. 탓해봤자 무엇하랴. 이미 내 손을 떠난 일들인데.
나로부터 네 칸 떨어진 곳에 앉은 이가 또 전화를 받는다. 속삭이듯 받다가 결국은 안 되겠다는 듯 벌떡 일어나고 목소리는 또 커진다. "절충안이 어디 있습니까. 이건 이래서 안 된다고 하시고, 저건 저래서 안된다고 하시고 그래서 최선의 결과라고 충분히 말씀드렸잖아요. 이미 제 손을 떠났다니까요."
우리는 시간이 주는 기회마다 최선을 택했고 그게 안 되는 일이라면 차선을, 또 그럴 일이 아니라면 차악이라도 택했다. 모든 순간은 그것들의 결과다.
이렇게 채워진 2022년도 곧 우리 손을 떠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