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데이 Feb 02. 2023

나의 이름을 가진 당신들을

Feat. 유퀴즈 온 더 블럭 - 이따끔 기자님

한 번 들으면 기억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이름을 가지고 싶었다. 누구라도 쉬이 잊지 못하는 이름으로 산다면 인생이 조금은 특별해지지 않을까 생각하고는 했다. 이름이 아주 흔한 편이라 그런 욕심이 있었나 보다. 태어나던 순간부터 집안에도 똑같은 이름을 가진 먼 친척이 있어서 어른들은 우리를 혜화동 00, 신당동 00으로 구분하고는 했다. 다행히 따로 얼굴을 볼 일은 없었다. 첫 돌 무렵 나란히 앉아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며 그랬다는 이야기만 들었을 뿐.


다행이라고 여기게 된 건 TV드라마를 본 이후였다. 오래전 흥행했던 유명 드라마 '또 오해영'이 그런 소재를 다뤘었다. 동명이인 캐릭터에 당시 대두되던 금수저와 흙수저 테마를 입혀 어려서는 물론 성인이 되어서까지 같은 이름, 같은 영역, 같은 상황에 놓이며 빚어지는 갈등을 재밌게 풀었기에 나 또한 애청했다. 드라마 공식 홈페이지 인물 소개 자체가 '난 그냥 흑해영, 걘 예쁜 금해영!' 문장 아래 못난이 인형을 들고 뾰로통한 표정으로 서 있는 배우와 '맞다! 너도 오해영이지?'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문장 아래 바비인형을 들고 환하게 웃는 배우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된다. 심지어 두 주인공이 같은 남자와 시간차를 두고 연애하는 극한 설정이었는데 금수저 오해영은 남자를 차 버렸고 흙수저 오해영은 남자가 차 버렸다. 아이 무서워라. 물론 현실에서는 그럴 일이 없겠지만 그래도 자아가 덜 성립된 사춘기 시절 주위에 동명이인이 없었으니 다행이었다.


요즘도 어딜 가나 같은 이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나니 주책맞게도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왠지 애틋하다. 옛 회사 동기와 몇 번 가족 모임을 가졌는데 그의 아내가 나와 이름이 같았다. 우리는 이따금 00 씨, 00 언니라고 부르며 친근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얼마 전까지 00 엄마라고 나를 불렀던 아이 친구의 엄마는 친해지고 나자 내 이름을 물었다. 나도 이름을 물었고 둘 다 한바탕 웃었다. 똑같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모임을 할 때마다 누군가 이름을 부르면 우리는 동시에 돌아보고 또 웃는다.


어제도 TV에서 내 이름을 보게 되었다. '유퀴즈 온 더 블럭'이라는 tvn 예능 프로그램을 꼭 챙겨보는데 엔딩 크레디트에 같은 이름이 나온다. 주인공도 아니고 출연자도 아니고 제작진 중 한 명일 뿐이겠지만 나는 그 이름을 볼 때마다 그분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분은 어디선가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매주 같은 시간 자신을 응원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르고 있을 테지.

 

공교롭게도 이번 회차에 소개된 게스트 중 한 명은 '이따끔 기자'님으로 이름이 독특해서 섭외된 케이스였다. 방송인 유재석 씨는 작년 힌남노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했을 당시, 프로그램 작가와 통화를 하며 뉴스를 보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제주도 태풍 상황을 중계하는 기자님 성함이 굉장히 특이했기에 기억하게 되었고 그 후 '세상에 그런 일이' 주제로 섭외가 이루어져 출연까지 하게 된 것이다.


역시나 내가 늘 동경하던 그런 이름이다.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 대체로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방향을 찾아 옳던지 그르던지 어쨌든 추구하는 방식으로 잘 살아내는 듯하다. 숨을 수 없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일례로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당시 사람 찾기 기능을 이용할 일이 종종 있었는데 이름을 넣으면 가입자들의 명단이 주르륵 떴다. '정다워'라는 예쁜 이름을 가졌던 친구는 검색결과가 한 페이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반면 나는 10페이지가 넘었다. 이름만 가지고는 내가 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때도 지금도 온라인이든지 오프라이든지 흔하디 흔해 숨기 편한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이따끔 기자님도 기분에 따라 두 가지 가명을 활용하신다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들으며 웃음이 나왔다.


브런치에 처음 가입하던 날이 떠오른다. 작가명을 입력하라고 하는데 본명을 넣어야 할지 이 기회를 빌어 미래의 필명을 만들어야 할지 짧은 고민이 스쳤다. 그러다가 지금의 필명으로 일단 결정하고 말았다. 사실 '기뻐라'는 별 뜻이 없다. 그저 화면에 뜬 이름 입력칸을 채우려고 키보드를 빠르게 두드릴 때 자주 발생하는 오타일 뿐이다. 기억에 남기 쉽게 하려고, 이름대로 그런 일이 많이 생기라고 일단 지어두었다. 독특한 이름을 꿈꾸었으나 흔한 이름 뒤에 숨는 것이 익숙하므로 언젠가는 둘 중 하나의 성격을 가진 더 좋은 필명을 선택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게 필요하다면 말이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이름은 '1.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하여 사물, 단체, 현상 따위에 붙여서 부르는 말 2. 또한 사람의 성 아래에 붙여 다른 사람과 구별하여 부르는 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이르는 사람이 되었을까. 그래도, 흔한 이름이라 때로 아쉽기는 했어도, 순수한 한글로 흔하지 않은 뜻을 붙여주셨기에 평생 소중하게 간직할 부모님의 선물이자 유산 그 자체라고 믿는다.


열 페이지가 넘도록 빼곡하게 나열된 같은 이름 중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살았을 수도 있겠지. 그래서 생면부지 동명이인들에게 애틋함을 느끼나 보다. 오늘도 어디에선가 나와 같은 이름으로 구별된, 나의 이름을 가진 당신들을 응원하며.


작가의 이전글 내 손을 떠난 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