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쿤데라의 가벼운 <농담>과 영화 무거운 <어톤먼트>
작년 한국에서 가져온 책들 중 밀란 쿤데라의 <농담>이 얼마 전 눈에 들어와 읽고 있던 중,
작가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마치, 농담처럼.
시대적으로 주입된 엄숙한 사회주의 사상을 맹신하는 여자친구에게 답답한 마음에 보낸 세 줄짜리 농담을 적은 편지가 주인공 루드빅의 인생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틀어버렸고, 운명의 여신이 틀어버린 삶의 방향을 다시 원상태로 돌리기에 개인은 아무런 힘이 없었다. 그저 가벼운(?) 농담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그렇게 그의 인생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그런데 그런 그가 평생에 걸쳐 준비한 무거운 복수는 너무나 허망하게 흐지부지 끝나버리고 만다. 정작 몇십 년이 지나 다시 만난 복수의 대상은 루드빅의 기억 속의 그가 아니었고 복수의 한방은 그 대상에게는 너무나 아무것도 아니어서 눈치조차 채지 못할 정도였으니..
인간은, 균형을 갈구하는 이 피조물은, 자신의 등에 지워진 고통의 무게를
증오의 무게를 통해서 상쇄한다. (중략)
화해한다면 나의 내적 균형이 일시에 깨져버리리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를 향한 나의 증오가 내 젊은 날에 닥친 고통의 무게와
평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가 이런 고통을 초래한 악의 화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나는 그를 반드시 증오해야만 한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한 개인의 운명은 어쩔 수 없이 시대의 배경안에서 결정되고, 때로는 운명의 작은 날갯짓 한 번으로 나의 인생이 뿌리째 뽑혀서 다른 곳으로 던져질 수 있다는 현실은 굉장히 아찔한데 모든 것이 나의 의지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어떻게 보면 이 모든 것들을 너무 심각하게만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영화 <Atonement>가 생각났다.
미성숙했던 소녀 브라이오니의 거짓 진술 한 번이 그녀의 친언니와 친언니가 평생을 사랑했던 남자 로비 터너, 두 사람의 사랑과 인생의 운명을 엇갈리게 한 가슴 아픈 이야기다. 약간의 상상력을 더했던 그녀의 (가벼운?) 거짓 진술은 서로 그토록 사랑했던 두 연인에게 너무나 가혹한 형벌이었고, 그 잔인한 운명은 두 사람의 죽음 이후에야 끝이 났다. 이러한 운명의 장난을 어떻게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생각이 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을 아프게 쿡 찌르는 일련의 일들이 있다. 때로는 아주 작은 하나의 계기가 생각지도 못한 좋은 기회들을 가져다주기도 하지만 그 어떤 이유와 상황에서든 너무 모든 것을 가볍게 생각하고 내린 어리석은 결정들은 평생 동안 되돌릴 수 없는 상처의 기억으로 남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겨우겨우 균형을 맞추고 있던 내면의 저울은 한 쪽으로 급속히 기울어, 다른 한쪽은 공중으로 날아가 버리는데 결국 그럴 때마다 다시 저울 한쪽을 찾아서 끼우며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생각은 '그것이 좋은 일이든 그렇지 않은 일이든 이미 지난 일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냉정과 열정 사이, 가벼움과 무거움 사이 그 어딘가에서 나의 균형을 계속해서 찾아가야 한다.'라는 것.
나를 소진시킨, 내가 그토록 고치고 시정하고 다시 바로잡아보려 애썼으나
소용없었던 -이미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 이제 어떻게 돌이킬 도리가 없는
것이므로- 그 모든 잘못과 오류들과 더불어 그렇게 잊혀질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가지 헛된 믿음에 빠져있다.
기억의 영속성에 대한 믿음과
(행위, 실수, 죄, 잘못 등을) 고쳐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둘 다 마찬가지로 잘못된 믿음이다.
진실은 오히려 정반대이다. 모든 것은 잊혀지고,
고쳐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고친다는 일은 망각이 담당할 것이다.
그 누구도 이미 저질러진 잘못을 고치지 못하겠지만 모든 잘못이 잊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