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
12월 막바지에 아버지가 코로나에 걸리셨다. 증상이 그다지 심하지는 않으시단다. 전염될까 걱정되니 친정엔 얼씬도 하지 말라고 하셨다. 엄마까지도 양성반응이 나왔지만, 다행히 목감기 정도의 증상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아버지도 아버지지만, 코로나에 걸려도 쉬지 못하고 아버지 간병을 하고 있는 엄마의 처지가 안타까워 속절없이 애만 태웠다.
"니 아부지 이상하다. 입을 꼭 다물고 물도 안 마시고 잠만 자...." 전화를 하니 엄마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땐, 그저 아버지가 병을 앓으신 후, 입맛이 떨어지시고 힘에 부치셔서 그런가 보다 했다.
격리기간이 지나, 애들을 데리고 친정엘 들러 아버지방으로 들어가는데 보기에도 누워있는 아버지가 이상했다. 눈은 뜨고 계신데 초점 없이 먼 곳만 바라보셨다. "아버지! 저 왔어요!" 큰 소리로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아이들은 어쩔 줄 몰라하며 말없이 서있었다.
물도 음식도 거부하신 채, 그렇게 아버지는 몸은 아버지 방에, 영혼은 다른 곳에 가 계신 듯했다.
뒤숭숭한 상황 속에서도 크리스마스 날 모인 터라 어른들은 식탁에 둘러앉아 엄마가 준비해 주신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섯 손주들은 어느새 할아버지의 상황은 잊은 채, 보드게임판을 앞에 두고 깔깔거리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지난 13년간 늘 그랬다. 친정집은 언제나 식구들로 북적였고, 맛있는 음식이 있었고, 이야기소리가, 웃음소리가 있었다. 아버지는 그렇게 시끌벅적한 걸 좋아하셨다.
아이들과 남편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날 밤 아버지 곁을 지켰다. 밤이 되자 아버지가 자꾸 소리를 지르신다. 엄마를 부르시는지, 엄마가 주무시는 방 쪽으로 고개를 돌리시고 소리를 치셨다. 엄마는 이미 며칠을 제대로 못 주무신지라 수면제를 드시고 겨우 쪽잠을 청하고 계셨다. 제게 말씀하시라고 해도 아버지는 계속 엄마 쪽을 향해 "어이! 어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지르셨다.
찾아보니 섬망이라는 증세였다. 노인들에게 나타나는 코로나 후유증 중 하나란다. '이렇게 가시는 가보다....' 허망함의 한숨만 나왔다.
밤을 꼬박 세고, 세 시간 남짓 자고 일어난 엄마와 동생과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이적 협상 중이신가 봐." 동생이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했다.
"엄마, 왜, 초반에 같이 읽었던 '뢰제의 나라'라는 책 기억나세요? 다함이란 소년이 교통사고를 당해, 몸은 중환자실에 누워있고 영혼이 뢰제의 나라를 떠도는... 아버지도 그런 상태 아닐까?" 엄마는 할아버지, 할머니 포함 집안 어른 여섯 분의 상을 치르고도 난생처음 보는 낯선 상황에 당황해하다가, 같이 읽었던 책의 내용을 듣자,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는 표정을 지으셨다.
인간이란 이렇게 약한 존재인데, 정신이 있을 때 아무리 고개를 쳐들며 힘자랑을 해도 죽음의 고비 앞에선 이렇게 무기력해지고 마는데.... 마음 한 구석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너무 불쌍하잖아. 어쩌다 말년에 저렇게 고생을 하고 누워 지내다 가는 게...." 좀처럼 울지 않는 엄마의 눈시울도 마지막이 가까워오는 듯 한 상황에 어느새 촉촉하게 젖어든다.
"어쩌겠니. 닥치는 대로 감당을 해야지." 아버지의 장례를 어디서, 어떤 식으로 치를지 상의를 했다. 엄마는 성당 신부님께 죽음을 앞둔 자를 위한 '종부성사'를 요청하시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고운 비단 보자기로 싸놓은 아버지의 영정사진을 꺼내 보여주셨다.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은 생명력이 가득하고 눈에는 명철함이 돋보였다. 그 멋진 아버지의 얼굴을 오래 마음속에 담아두고 싶어 색연필을 꺼내 사진 속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영혼이 그 어느 곳에 도착하시건 평온하시기를 간구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나 또한 몸은 지하철 좌석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마음은 친정집에 계신, 아니 어느 곳에 계신 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영혼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에겐 몸의 죽음만이 다시 사는 길일지도 모른다. 그 13년을 병원침대에 누워 움직일 수 없었던 아버지. 그 지긋지긋하고 갑갑한 삶으로부터 진정한 해방은 어쩌면 이 길만이 유일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가족들의 사랑 속에 계셨잖아!' 스스로를 다독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아버지께 마지막으로 로마서를 꼭 읽어드리고 싶었는데.... 아버지의 영혼만이라도 로마서를 들으실 수 있게, 기도하며, 핸드폰 녹음버튼을 누르고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버지!
얼마나 힘드시고 두려우셨어요? 며칠 전 영상통화를 할 때도 괜찮으신 듯했는데, 한참만에 힘드신 모습 뵈니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며칠만 지나면, 2023년이 새해가 시작됩니다. 3년 전, 교회 새벽기도회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노령의 한 영국인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설교가 끝난 후, 용기를 내 앞으로 나아가 목사님께 간절한 얼굴로 물었습니다. “나의 아버지가 사지마비로 10년 넘게 고생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 성경을 읽어드리고 싶은데, 어느 부분을 읽어드리면 좋을까요?”
영국인 목사는 1분쯤 눈을 감고 기도하는 듯하더니 “Romans! 로마서!”라고 답을 했습니다.
아버지께 처음 시작할 때는 그저 아버지의 외로운 마음을 위로해드리고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때 그 새벽, 노목사가 눈을 감고 기도하다 ‘로마서!”라고 이야기하던 장면이 생생히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께 언젠가는 로마서를 읽어드려야지 생각했지요.
로마서는 성경 속 인물 중, 가장 명철한 사도 바울이, 기독교를 핍박하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 회심하고, 로마교인 들에게 복음의 원리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쓴 편지글입니다. 짧지만 그 가치가 커서 성경의 꽃으로 불리지요. 하지만 처음 대할 때는 이해하기 쉽지가 않아서, 배경지식이 될 수 있도록, 그동안 첫 책 로빈슨 크루소로부터 시작해 20여 권의 책과 창세기, 출애굽기, 요한복음, 마태복음 등 성경을 읽어 드렸던 거고요.
아버지의 힘드신 모습을 보며 이젠 로마서의 책장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평생에 저희 삼 남매와 다섯 손주의 뿌리가 되어 주심 감사합니다. 병상에서도 명철한 모습으로 저희의 앞길을 생각해 주시고, 사랑을 보여주셔서, 나 또한 아버지처럼 나이 들고 힘들어도, 명철함과 사랑을 잃지 않겠다는 목표를 갖게 해 주심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세상 그 어떤 남편도 보여줄 수 없는 신뢰와 사랑의 눈길로 엄마를 바라봐주셔서, 엄마가 그 힘으로 우리에게 그 모든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울타리가 되어 주심 또한 감사합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와 마지막 대화라면 아쉽지만 그래도 감사하다. 누워계신 아버지와 책을 읽고 대화하며 아버지를 마음의 눈으로 보았던 지난 2년 동안, 나는 아버지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이 사랑하게 되고, 아버지의 딸로서 긍정적인 자아상을 얻을 수 있었다.
'눈빛만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아버지와 딸' 그것이 아버지의 고난이 그 마지막 끝자락에서 나와 아버지에게 준 선물이었다.
그러니 보내드릴 때에도 웃으며 보내드릴 수 있지 않을까?
쉽지는 않을 듯하다. 생각만으로도 어느새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흐르고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