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비얀코 Feb 14. 2023

사랑으로 이야기하기, 이야기로 사랑하기 19

정약용 코드 - 고난의 마법

낭독할 책을 고르는 일은 쉽지가 않다. 읽는 사람은 물론, 듣는 사람까지 빠져들게 하려면 지식으로 일관된 책은 지루하기 마련이다. 이야기 전개가 흥미롭고, 등장인물도 여럿 되어 실감 나는 연기까지 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다. 그날도 서점에 들러 습관적으로 낭독할 책을 찾아보던 중이었다. '정약용코드'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다산 정약용! 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역사 속 인물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목민심서 등 그의 저서와 '다산'이라는 그의 호가 들어간 책들을 사서 읽곤 했다. 남산도서관 앞에 서 있는 그의 동상을 올려다보며 그와 상상 속 묵언의 대화까지 하는 걸 보면 나의 팬심은 찐인 듯하다. 


책을 훑어보니 역사 속 인물을 다룬 책이지만, 낭독도 가능하겠다 싶었다. 시대상에 대해 재미있고 쉽게 설명이 되어 있었고, 정약용이란 인물을 요즘 유행하는 '통섭형 인재'의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었다. 손주들 교육에 관심이 크신 부모님께도 흥미로운 내용이 될 듯했다. 


집에 와 자세히 책을 읽어 가는데, 이건 무슨 일인가? 엄마도, 같이 책의 낭독을 들으시는 고모님께서도, 약속이라도 한 듯, 정약용에 대한 카톡 메시지를 보내주시는 것이 아닌가? 초등학생 조카조차 '정조와 정약용'이란 책을 읽고 있는 데, 이 정도면 필시 '정약용이 우리에게 할 말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팬심에 대한 답례로 정약용선생께서 값진 불변의 진리를 알려주려고 하시나? 2022년의 마지막 낭독책은 이거다 싶었다. 


아버지 


2022년 한 해의 마지막 달입니다. 지난 11개월 동안 우리가 몇 권의 책을 함께 읽었을까요? 


심장수술을 두 번이나 하고도 기적적으로 미국 굴지의 건축회사를 만든 하형록 회장의 이야기 - 잠언 31

제주거상 김만덕의 이야기 – 꽃으로 피기보다 새가 되어 날아가리

삼성 이병철 회장의 신에 대한 질문과 삶에 대한 이야기 – 이병철의 하나님

전립선 암환자의 자연치유법 – 사라진 암

기운이 없어지신 아버지를 위한 기도의 마음으로 읽었던 - 요한복음

아버지께서 요청하셔서 죽음 후의 이야기에 대해 읽어봤던 - 사후생

우리의 뿌리가 되신 아버지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읽었던 천지창조 이야기 - 창세기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의 이야기 – 출애굽기

신약성경의 가장 첫 이야기 - 마태복음

그리고 고난의 의미에 대해 새겨 본 - 산산조각까지 모두 열 권의 책을 같이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도 기운을 회복하시고, 엄마의 갑상샘항진증도 나아지시고, 특별히 엄마가 집 앞 도서관서 책을 빌려 읽으시며 재미를 느끼신다니, 책과 이야기에는 치유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 분명한 사실임을 느낍니다. 


올해 마지막 책을 무엇으로 할까 서점에 들렀는데 ‘정약용코드’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책을 사 와 읽기 시작하는데 엄마가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대한 영상을 보내주시더라고요. 우연의 일치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은 고모님께서도 정약용에 대한 이야기를 보내주시는 게 아니겠어요? 


같이 책을 읽는 모두의 마음이 어떻게 이렇게 하나로 모아질 수 있을까 신기했습니다. 


어제조카 녀석이 읽고 있는 책이 ‘정조와 정약용’인 것을 발견하고는 역사 속 인물 정약용이 우리 가족에게 꼭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정약용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문과와 이과뿐만 아니라 예술과 의학의 분야까지도 통달한 세계에서 인정받는 우리나라의 인재입니다. 변화가 많은 미래에는, 여러 분야를 두루 섭렵한 다빈치형 인재, 정약용형 인재가 각광받는다고 합니다. 


어제 다섯 손주의 적성과 진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물으시던 아버지한테, 아마도 역사 속 정약용이 손주들 교육에 대한 영감을 주기 위해, 우리 모두의 마음문에 노크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이 잘 들어보세요. 



정약용의 일생은 참으로 드라마틱하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특출한 총명함을 갖추었던 그는 정조임금에게 발탁되어 젊어서부터 권력을 누린다. 정약용이 살던 조선 후기는 나라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시스템은 부재하고, 부정부패가 사회에 곳곳에 판을 치고 있었다. 권력을 쥐기 위한 양반들의 당파싸움 속에서 백성들의 삶은 나날이 힘들어져 가고 있었다. 


과거시험장의 모습만 봐도 양반자재 한 명을 과거에 급제시키기 위해, 좋은 자리 잡는 사람, 햇빛을 가려주는 사람, 문제를 푸는 사람, 글씨를 대필해 주는 사람, 망을 보는 사람과 수험생 본인, 이렇게 여섯 명이 한 조로 들어가 시험을 보았다고 한다. 엄숙하고 공정해야 할 과거시험장이 이 정도였으니 다른 곳의 부정부패가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정조가 없으면 정약용이 없고, 정약용이 없으면 정조가 없었다고 할 만큼, 두 사람은 각별한 사이였다. 유학뿐 아니라 공학, 음악, 의술 등에도 정통한 실학자 정약용은 자신을 신임해 주는 정조를 위해, 또 백성을 위해, 사회를 개혁하고 싶었다.  


그때 마침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한 천주교의 교리가 조선에 들어오게 되고 세상을 개혁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정약용 형제 들은 천주교 교리 공부 모임을 통해 조선 개혁의 꿈을 꾼다. 


유교의 나라 조선의 학자들에게 천주학은 체제를 전복할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사상으로 받아들여져 천주교도들은 지속적으로 박해를 당한다. 결국 정약용과 형 정약전은 배교를 함으로 목숨만을 부지해 각각 강진과 흑산도로 유배를 가게 되고, 동생 약종은 순교를 한다. 


임금의 총애를 얻던 관리에서 땅끝 유배죄인의 처지가 된 정약용. 18년 유배생활이라는 고난의 시간 동안 그는 500여 권이 넘는 책을 쓰며 조선 최고의 실학자로 다시 태어난다. 복사뼈가 세 번 뚫렸을 정도로 학문에 매진했다던 그의 업적이 전 세계에 알려지며, 정약용은 2012년 동양인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로 선정된다. 


그가 잘 나가는 관료로 무사히 생을 마쳤다면, 그 같이 많은 저술이 나올 수 있었을까? 지금처럼 이 나라의 가장 존경받는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건 어려웠을 듯싶다. 


정약용의 유배생활은 그와 그의 가족에겐 고되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정약용이 스스로를 뛰어넘을 수 있는 디딤돌이 되었던 듯하다. 고난의 시간이 빚어낸 역사의 마법이다. 


"뭐 하세요?" 

"아버지 똥 작업 하는 날이잖아. 다 끝내고 밥 한술 뜨는 중이야." 

"또 신라면 드세요?"

"아니 요즘은 이런 날도 아무거나 잘 먹어. 이젠 다 익숙해져서. 이걸로 이젠 '생활의 달인'에나 나가야 할까 봐. 호호." 


아버지가 자리에 누우신 후, 오랫동안 엄마는 아버지 대변수발을 하는 날엔 꼭 매운 라면을 드셨다. 도저히 비위가 상해 다른 음식은 드실 수 없다고 했다. 냄새가 민감했던 엄마가 괴로운 일상을 13년간 버텨오시는 동안, 예민하던 자신을 넘어, 쉽지 않은 순간조차 웃으며 넘기실 수 있게 된 것 같다. 수술 후 고생하는 성당 자매님을 위해 새로 담근 김치와 반찬도 가져다 드리고 오셨단다. 


옛이야기 하나가 떠오른다. 수련을 하는 제자가 수련과정이 어렵다며 불평을 했다. 스승이 물 한 컵에 소금 한 컵을 붓고는 제자더러 그 물을 마셔보라고 했다. 제자는 물을 맛보고 이내 얼굴을 찡그렸다. 


스승은 다시 한 컵의 소금을 들고 제자와 함께 집 앞 호수로 갔다. 호수의 물에 컵에 담긴 소금을 붓고 호수의 한 컵을 떠서 제자한테 마시게 했다. 

"아직도 짜냐?" 

"아닙니다. 전혀 짜지 않습니다." 

"달라진 건 소금을 담는 물의 양이지 소금의 양은 같았다. 너도 수련의 고단함을 대하는 네 마음 그릇의 크기를 키우도록 해라."    


장사꾼 됫박처럼 깎아 잰 듯 자기만을 챙기던, 그래서 '불여우', '깍쟁이'라는 별명이 늘 따라다녔다던 엄마의 마음 그릇은 시집살이 30년으로 김장용 대야만 해지더니, 노년의 13년 남편 병시중을 하며 이젠 작은 호수가 되어 그 마음에 하늘빛을 담게 된 것 같다. 


나도 어쩌다 불편한 상황을 마주하면 소금물 이야기를 떠올린다. 호수는 못되어도 양푼 정도는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불편한 마음은 이내 사라지고 상황을 지혜롭게 넘길 수 있게 되는 듯하다.   


둘째 아이가 고등학교에 지원하면서 온라인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아이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답을 한다.


"우리 할머니요. 할머니는 지난 13년간 몸이 마비된 할아버지를 간호하시면서 잘 돌봐주시고 계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해주시고, 따뜻한 손길로 저희를 안아주십니다. 저도 할머니처럼 아픈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는 의료기업을 만드는 게 제 꿈입니다." 


고난이 빚어낸 또 하나의 마법의 순간이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으로 이야기하기, 이야기로 사랑하기 18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