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듦의 영성
우리나라 대표지성인 이어령선생은 70세가 넘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 그리고는 AI가 도래할 미래에 인간이 기계와 차별화할 수 있는 것은 영성뿐이라며 영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의 저서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그가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게 된 배경에는 딸 이민아 목사의 삶과 기도가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혼, 자녀문제, 암투병, 실명위기 등 한 사람의 인생에 일어난 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많은 고난을 겪고도, 불우한 청소년을 도우며 살았던 이민아 목사의 희생적이며 아름다운 삶은, 이어령이라는 우리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무신론자를 '하나님의 아들'로 변화시키고, 인생 마지막을 '영성이 길이다'라는 화두를 던지게 했다.
영성이란 무엇일까? 사전을 찾아보면, 기독교적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모든 자녀들에게 주어진 영적인 성품을 말하며 그 형태로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온전한 사랑, 말씀에 기초한 통찰과 능력, 그리고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깨달음을 갖는 것이라 나와 있다. 철학적 관점에서는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 타인 및 상위 존재와의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시키며 신체, 영혼, 마음을 통합하는 에너지라고 정의되어 있다. 어렵다!
나도 신앙을 가지면서 자연스레 영성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어, 책도 많이 읽고 강연도 들었다. 짧은 나의 식견으로 쉽게 설명하자면 영성이란 '인생은 내 마음대로 살아지는 게 아니니,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는 다른 힘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 힘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그 힘이 세상을 운영하는 원리를 깨닫고 그대로 사는 것' 정도가 아닐까.
그러자니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젊고 팔팔한 나이에 영성을 갖기란 쉽지 않은 것이다. 영성을 갖기 위해서는 은퇴 후 노년의 힘 빠짐이 축복인 것이다.
아버지께 읽어드릴 다음책으로 '나이 듦의 영성'을 골랐다. 이 책에선 노년이 평생 부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넉넉히 타인에게 나눠줄 수 있는 최고의 시기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한마디로 복 받을 시기, 복을 흘러 보낼 수 있는 시기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면 성경에서도 많은 인물들이 노년에 하나님을 만나 복을 누린다.
특히 창세기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 한다. 혼자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복의 근원, 즉 '복이 흘러나가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을 모르던 아브라함은 두려움이 많고 눈앞에 자기 이익만을 챙기던 사람이었으나, 하나님을 만나 담대해지고 마음씀이 넓은 사람이 된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브라함은 유대민족의 선조 격으로 복 받는 사람, 복이 흘러나가는 사람의 표상이 되어 유대민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정신이 되었다.
부모님께 책을 읽어드리며 아버지 엄마 노년에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 드릴 수 있으니 감사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친구의 한마디가 내 생각을 바꿔놓았다. "너도 대단하지만 그걸 다 들으시는 부모님도 대단하시다!"
생각해 보니 친구의 이야기가 맞다. 짦으면 15분, 길면 30분가량의 녹음파일을 매일 빼놓지 않고 듣는다는 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주변 지인이 보내주는 목사님 말씀도 매일 챙겨 듣기 어려워 며칠씩 빼놓고 넘어가기 일쑤인데, 기억하는 한 내가 보내드린 파일을 엄마는 2년 동안 단 하루도 듣지 않으신 적이 없다.
간병에 지쳐 대상포진에 방광염에 고생을 해도, 딸이 보내 준 파일이라 빼놓지 않고 들으신다고 하셨다.
지난 2년 동안, 아니 평생, 나는 그런 눈물 나는 사랑과 응원을 받았다.
그렇게 엄마는 평생을 그렇게 자식일이라면 열일 제쳐두고 온 맘을 다 쏟으셨다. 어릴 적부터도 학교 입고 나간 옷이 맘에 들지 않으면 그날 저녁 침대 머리맡엔 새 옷이 놓여 있었고, 고3 자율학습이 끝나고 독서실 가는 길엔 하루도 빠짐없이 맛있는 간식을 싸와주셨다. 분당 집에서부터 서울의 학교나 직장까지 언제고 필요할 때는 기사를 자청하셨다.
자식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그렇게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고 사셨다. 그래서 시집식구들이건 친정식구들이건 엄마라면 고마워하고 아낀다. 엄마의 딸인 것만으로 나도 존중받고 그 복을 누리고 산다. 엄마로부터 시작된 복이다.
성경을 읽고 부모님께 책을 읽어드리기 시작하면서 부모님과의 관계뿐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과, 심지어 자연과도 관계가 좋아졌다. 특히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특별히 애정 어린 눈으로 봐주시며 맛있는 음식도 해주시고, 선물도 주시고 또 건강정보도 보내주신다. 나이 드신 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니 세월이 그분들 안에 쌓아놓은 지혜를 만날 수 있어 좋다.
미리 노후의 삶을 엿보며 오늘의 내 삶의 운동화 끈을 조여 맬 수 있으니 참 복이다. 이 또한 고난 속에 사시는 엄마, 아버지께로부터 온 복이다.
아버지 사고 후, 엄마는 늘 "하늘도 무심하시지 평생 할 도리 다 하려고 하고,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게 좋아서 살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니?" 하셨다.
하나님을 모르고도 복을 흘러내려 보낼 줄 알 던 엄마, 그리고 그런 엄마를 지지해 주고 믿어준 아버지. 하나님은 그런 두 분을 사랑하셔서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주시고 싶으셨던 것 아닐까? 아브라함이 그랬듯 고난을 통해 더 강한 존재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희생 속 사랑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존재로 높여주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하나님을 믿음으로, 더 큰 복의 근원이 되게 하고 싶다는 하나님의 스카우트 제의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