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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a Jul 31. 2020

빨간 머리 앤의 추억

딸과 함께 그 시절 나를 만나는 시간

주근깨 빼빼 마른 빨간 머리 앤


이 노래가 나오길 손꼽아 기다리며 보던 아이가 있었다. 노래를 따라 부르며 앤과 함께 울고 웃고 상상하며 앤이 자랄 때마다 아이도 함께 자랐다.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을 보며 꿈과 환상을 키웠다. 중학생 때는 버스비로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서점에서 빨간 머리 앤 뒷 이야기가 담긴 책을 구입하고 집까지 걸어오기도 했다. 애니메이션에는 나오지 않은 그 뒷 이야기가 있을 줄이야. 감탄하며 아껴 읽은 기억이 있다.


지금은 딸아이가 빨간 머리 앤 팬이 되어 빨간 머리 앤, 에이번리의 앤, 레이먼드의 앤 3권 시리즈를 여러 번을 읽고 또 읽으며 울고 웃는다.


중학생 때 내가 읽은 빨간 머리 앤 뒷 이야기가 담긴 책(아직 이 책이 있었다.)과 지금 아이가 무한 반복 읽고 있는 앤 시리즈






넷플릭스로 종종 영화를 보는데 그때마다 추천 목록에 ‘빨간 머리 앤’이 등장한다. 아이가 보고 싶다 조른 지 한참이 되었는데 시리즈물이다 보니 여러 날에 걸쳐 보아야 하고 제법 양이 많아 매번 거절하고 있었다.


숙제도 미리하고 해야 할 것을 다 하면 하루에 한 편씩 보게 해 주세요.


라는 요청을 받았다. 시리즈물은 한 번 보면 빠져드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여전히 망설여졌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한 애니메이션을 떠올리며 ‘하루에 딱 한 편’을 고수하여 허락하게 되었다. 아이는 빨간 머리 앤을 보며 종알종알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까르르르 넘어가게 웃기도 하고 훌쩍훌쩍 울기도 하고 버럭 화를 내며 감정이입을 했다. 그 모습을 보며 잊고 있던 추억이 소환되었다. 주로 설거지를 하거나 책을 읽는 중이어서 처음엔 별로 집중하지 않았는데 여러 날 횟수가 거듭하다 보니 어느 순간 옆에서 같이 보고 있었다.


“어? 저건 원작과 다른데?”

“응, 책에서는 저런 내용이 안 나와.”

“빌리는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책에서 빌리는 원래 앤을 좋아해.”


라며 종알종알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10대 초반 나의 상상과 환상의 친구 앤이 다가왔다. 초록지붕 집의 퍼프소매 옷을 입고 싶어 하던 앤, 2층 창밖의 꽃나무에게 인사하고 모든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대화하는 주근깨 투성이에 못 말리는 상상 쟁이 앤, 그 아이가 그 시절의 나와 함께 온 것이다.


어떤 날엔 정말 하루에 딱 한 편, 조금 여유가 있는 날에는 두 편 이런 식으로 횟수가 거듭되었다. 신기하게 시즌이 바뀔 때마다 등장하는 아이들도 자라고 있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은 앤에게 치유를 받는다. 어릴 적부터 대인관계 기피증이 있던 매튜, 우울증에 시달린 어머니 덕분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마릴라, 그저 엄하고 무서운 할머니였던 조세핀 고모할머니, 고리타분한 생각에 갇혀있던 마을 어른들까지 모두 앤을 만나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고 나면 자신의 내면을 치유하고 성숙해진다. 물론 앤도 함께 자란다.


“엄마는 앤이 정말 좋았어. 못 말리는...... 그러고 보니 너랑 좀 닮았어.”

“그렇지? 뭐든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건 좀 닮았어.”

“정말 비슷해. 그리고 사실 화를 불같이 내고 기쁠 땐 엄청 기쁘고 슬플 땐 엄청 슬퍼하는 것도 닮았어.”

“(버럭)엄마! (살짝 누구러지며)사실 좀 그런 거 같기도 해.”

“하하하하하하”




‘함께’의 소중함


같은 것을 좋아하고 같은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 사춘기를 코 앞에 둔 아이와 같은 것을 좋아하고 함께 하는 경험은 분명 우리에게 힘이 될 것이다. 앤이 성장하며 겪은 여러 가지 시련들이 종류는 다르지만 우리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보인 매튜와 마릴라


일상의 익숙함 속에서 매일 변화 없는 삶을 살며 아이를 키워본 적 없던 마릴라와 매튜가 점점 성숙한 부모가 되어 갔듯 우리도 그러할 것이다. 매 순간 변화하는 마릴라와 매튜의 모습이 어린 시절엔 와 닿지 않았는데 이번엔 크게 와 닿았다. 아이를 키우고 성장시키는 일이 결국 부모 스스로도 키우고 성장하는 일임을 다시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매튜와 마릴라에 비하면 아직 한참을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앤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마릴라의 모습, 앤의 마음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매튜의 모습 등 앤을 키우며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부모로서 나아갈 방향을 잡아가는 기분이었다.


치유받고 내면이 성숙해지는 그들을 보며 나도 성장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아이를 힘나게 한다는 앤의 말, 진정한 행복을 알려면 슬픔도 알아야 한다는 스테이시 선생님의 말, 우리 모두는 우리가 깨닫지 못한 소원의 결실이라는 마릴라의 말들이 마음에 닿아 별이 되었다. 그들의 변화와 성장통을 통해 나도 치유받고 위로받았다.


앤과 함께 성장한 마릴라와 매튜 그리고 사랑스러운 소녀들




지금 함께 한 빨간 머리 앤의 추억이 어른이 된 아이에겐 어떤 추억으로 기억 될까? 엄마가 된 아이가 자신의 아이와 함께 빨간 머리 앤을 본다면 어떤 기억을 떠올릴지 궁금하다.



-  언젠가 앤의 배경이 된 캐나다의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가고 싶다는 꿈도 꾸어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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