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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a Mar 16. 2021

할머니가 떠나셨다.

한 인생이 제자리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할머니가 떠나셨어


세수를 마치고 화장대 앞에 앉았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며칠 전부터 할머니 상태가 안 좋아지고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은 터였다. 그럼에도 잘 넘기고 계셔서 이렇게 괜찮아지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었는데 결국 할머니가 떠나셨다. 구순이 넘은 할머니는 과거를 거의 잊고 해맑은 모습이었는데 마지막엔 어떤 마음이셨을까? 어떤 기억을 가지고 떠나셨을까?




농부의 딸로 태어나 평생 땅을 일구고 산 농부의 아내였으며 본인 스스로도 일생 농부였다. 하루도 쉬지 않고 땅에 씨를 뿌려 거두며 사셨지만 늘 가난하고 힘겨운 날들이었다. 일제시대부터 해방, 한국전쟁을 모두 겪은 가장 파란만장한 세대셨고. 억세고 드세고 욕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잘하셨다는데 내 기억 속에는 욕하는 모습이 남아있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 앞에서는 참으셨던지, 아님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 속에서 가물거리다 꺼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어릴 적 같이 살던 그 집과 그 시절 추억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매일 마당에 그림을 그렸던 것, 마당에 돌아다니는 닭과 병아리를 피해 다녔던 것, 외양간에 메어있던 소의 크고 깊은 눈, 집 앞 공터에서 아이들과 놀던 것, 냇가에서 반딧불 이를 보며 목욕했던 것, 산을 뛰어다니며 놀던 일들이 떠오른다. 밤에 무서워 가지 못했던 널빤지가 놓여있던 푸세식 화장실도 함께 말이다. 그 조차도 냄새보다는 추억으로 몽글몽글 예쁘게 떠오르는 걸 보면 그땐 어리고 세상이 다 신나고 예쁠 때였나 보다. 뭐든 다 좋았다. 할머니도 그저 할머니였다.


가끔 할머니는 마당에 곤로를 꺼내놓고 커다란 가마솥뚜껑을 거꾸로 얹혀서는 부침개를 부치곤 했는데 감자를 숟가락으로 긁어 강판에 간 후 대충대충 반죽을 해서 떠 넣어도 신기하게 부침개가 동그랗게 부쳐지는 모습이 신기했다. 여성스러운 분은 아니셨는데도 부침개는 정말 똥그랗게(동그랗다는 표현으로는 무언가 부족하다) 늘 한결같이 예뻤다. 할머니 옆에 앉아서 가마솥 뚜껑 위에서 막 나온 부침개를 얻어먹으며 그 모습을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았다. 어떻게 그런 신기한 기술이 있는지 할머니 손이 신기하기만 했다. 반죽 위에 숟가락이 몇 번 슥슥 지나가기만 하면 어느새 둥글고 일정한 크기의 부침개가 탄생했다. 그 주변으로 숟가락에 들기름을 떠서  둥글게 돌려주면 움푹 파인 솥뚜껑 가운데로 기름이 몰려들며 지글지글 부침개가 익어갔다. 기억 속 할머니의 가장 다정하고 인자한 모습이다. 옆에 앉아서 종알거리는 나를 내치지 않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어쩜 할머니도 속이 깊고 마음이 예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모질고 힘들어서, 아홉 번째 막내딸이었는데 몽땅 딸만 태어났다고 어릴 때부터 구박을 받아서, 사랑 한 번 못 받아서, 우리 할머니도 많이 속상하고 힘이 들어서, 억세고 드센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좋은 집에서 태어나 사랑받고 자랐으면, 이렇게 부침개도 동그랗게 잘 부친다고 칭찬받고 자랐으면, 할머니는 어쩌면 많이 달랐을지도 모른다. 많이 아프셨을 때처럼 따스한 손을 가진 잘 웃는 해맑은 여인이었을지도 모른다.


할머니의 유일한 며느리인 엄마에게는 세상 둘도 없이 모질고 무서운 시어머니셨다 한다. 할머니 앞에서 크게 숨 한 번 쉬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했다. 그런 할머니 옆에서 어린 우리들을 데리고 몇 년을 시집살이를 하셨으니 그 시절 엄마의 청춘은 어땠을까.... 그 시절 엄마 이야기를 들으면 ‘잘 참았노라’ 엄마를 토닥이며 위로하는 것이 우리의 일이다. 서럽고 힘들었던 기억이 좀처럼 잊히지 않는지 엄마는 그 이야기를 두고두고 한다.




할머니가 떠나신 날은 봄이 시작되고 있었다. 어디선가 따스한 바람이 불고 나무에는 작은 잎사귀들이 돋아나고 포근한 햇살이 비추는 계절, 봄이 매일 한 발자국씩 다가오고 있었다. 처음 할머니가 쓰러지신 날은 찬바람이 강하게 불던 11월 어느 날이었다. 응급실로 가셔서는 며칠을 중환자실에 계시다 회복되셨는데 영 말씀을 못하고 자가 호흡이 불가능한 상태셨다. 결국 할머니는 요양 병원으로 가시는 것으로 결정되었고 그 전날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뵈었다. (요양병원에 가신 후에는 가족들 면회도 일절 금지였다.) 코로나로 병원에서조차 1인 면회만 가능해서 퇴근 후 여러 절차를 거치고 병실에 들어섰다. 링거와 콧줄을 단 할머니가 내내 주무시다가 내가 들어갔을 때는 눈을 뜨고 계셔서 손을 잡고 내 이름을 알려 드렸다.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반응은 없었지만 눈가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도 할머니 손을 잡고 많이 울었다. 마당에 곤로를 놓고 예쁘게 부침개를 부치던 할머니는 이제 세상의 끈을 놓으려 하시는구나.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영 없구나 싶었다. 하나의 삶이 세상에 왔다가 그 삶을 마치고 다시 돌아가려 하고 있음을 느꼈다. 그렇게 요양병원에서 겨울을 보내고 따스한 바람이 부는 봄날 할머니는 영영 다시는 오지 않을 여행을 떠나셨다. 남은 우리가 힘들까 봐 추운 겨울, 모진 바람, 비바람 부는 날을 다 피해 그렇게 떠나셨다.


할머니가 떠나셨지만 이 날은 입학식 날이었다. 새로 옮긴 곳에서 새 아이들을 처음 만나는 날이었으므로 오전에 출근을 하고 오후에야 장례식장에 갈 수 있었다. 장례식장에는 하얀 국화와 할머니의 영정사진이 있었다. 많이 아프셨을 때 할머니가 아니라 부침개를 부치고 농사를 짓던 건강하고 젊은 날의, 빠글빠글 파마를 한 할머니였다. 기억 속에 제일 많이 남아있는 할머니 말이다. 그 할머니가 거기에 계신 것이 실감 나지 않았다. 그냥 떠나셨다니 떠나셨구나 했다. 남은 우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고 종종 업무를 하거나 스마트 폰을 들여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할머니 이야기도 했고 살아가는 이야기도 했다. 조촐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이었다. 모두들 이런 일이 있어야 만나는구나 하며 어색하게 마주 앉아 여러 날을 보냈다.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고 구순을 넘긴 할머니의 상은 호상이라고 했다. 그래도 아빠와 엄마, 고모와 삼촌들은 종종 울었다. 그 옆에서 우리도 종종 울었다. 그러다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며 다 잊고 웃었다. 삶은 계속되고 있었다. 떠난 자는 놓아야 하는 것이지만 남은 자에겐 이어가야 하는 것이 삶이기에.


어떻게 한 생이 세상에 오는 걸까?
어떻게 한 생은 세상을 떠나는 걸까?
다시는 오지 못하는 길을 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 순간 어떤 기억을, 추억을 가져갈 수 있을까?
만약 그 어떤 기억도 남지 않는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결국엔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그 길이 멀리 있지 않음을, 결국 삶과 하나로 공존하고 있음을 진실로 알게 됐다.


사그라진 할머니의 생은 어디로 갔을까?

기억과 감정들은 어디에 있을까?


아직은 돋아나지 않은 잔디에 둘러싸인 할머니의 무덤을 보며 생각해 본다.


동그랗게 잘 부쳐진 부침개를 보면, 혹시라도 감자를 긁어 닳아버린 숟가락을 볼 일이 있다면(요즘은 쉽게 볼 수 없겠지만) 따뜻하게 손을 꼭 잡아주며 ‘건강해야지’했던 지난 여름날의 할머니가 생각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의 삶은 이제는 당사자에게서는 놓여났지만 이렇게 남은 사람들에게 조각조각 흩어져 어떤 기억으로 이어지는 거였다.


할머니의 영혼이 부디 평안하시길, 그 여행이 즐거우시길 기도해 본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 할머니의 동그란 부침개가 어린 나에겐 마법처럼 신기했노라고, 또 한 생을 잘 살고 왔노라고 꼭 말씀드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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