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연도를 넘어선 인류애를 향해
인류애. 내게 부족한 것. 차라리 요즘 청소광 브라이언이 외치는 “I hate people.”에 가까운 사람.
어린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 배려와 양보 대신 노키즈존을 택해온 인생. 아기보다 새끼 보기를 선호하는 편.
2023년 11월 1일. 동생 유전자의 1/2이 들어간 생명체가 세상에 나왔다. 내 첫 조카 아린이.
동생은 나와 부모 유전자의 1/2을 공유하고 있다(모든 가정은 확률적으로 최대치이다.). 아린이가 가진 유전자의 1/4은 나와 같다. 물론 삼신할매 로또로 우리가 공유한 유전자는 0%에 가까울 수도 있다. 하지만 생김새와 먹성을 보건대 그녀는 나를 최대로 닮은 거 같다. 서론이 이렇게 긴 이유는 이 귀엽고 통통하고 사랑스러운 존재가 나를 조금은 바꿔 놓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기 위해서이다. 조카의 탄생 이후로 공공장소에서 아기들이 자지러지게 우는 것을 보고도 인상 찌푸리지 않았다. ‘아기가 배가 고픈가? 기저귀 갈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데 이르렀다. 인류애가 1% 정도는 늘어났다.
내가 아린이를 사랑하는 이유가 그저 유전적 가까움(근연도) 때문일까?
우리 아린이가 누가 봐도 작고 통통하고 귀엽기 때문일까? (이미 콩깍지라 객관성을 잃었다. 아린이 탄생 전에는 누가 봐도 예쁘고 귀여운 아기만 좋아했다.)
우리 아린이가 누가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코 찡긋 눈이 사라져라 웃고 크게 까르르 웃기 때문일까?
우리 아린이가 무엇을 줘도 잘 먹고 넘어져도 울지 않고 씩씩하게 일어나 걷기 때문일까?
예전 EBS 다큐에서 타인에 대한 좋고 싫음은 본능으로 굉장히 짧은 시간 안에 (2초인가?) 결정되며 그 이후에는 논리를 만든다고 그랬다. 나도 무수한 인연들을 이렇게 선호해 오고 그/그녀가 좋고 싫은 이유를 그 이후에 덧붙여 왔을 것이다. 제삼자에 대한 선호도는 좋거나 싫거나가 반반이지만, 근연도가 높은 더 어린 존재에 대한 선호도는 우선 ’매우 좋음‘으로 시작한다. 그러니 좋아하는 이유를 찾는 데만 에너지를 쓰게 된다. 두 선택지 중에서 한 선택지만 남으니 그에 대한 근거를 찾는 데만 에너지가 집중된다.
나는 타인에 대한 선호가 우선 0부터 시작된다. 아니 마이너스일지도. 50부터 시작해도 좋을 텐데, 인간에 대한 불신이 깊다. 통하는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상승 곡선을 그리다가 통하지 않는 구석이 보이면 다시 바닥을 친다. 그러다 보니 인간관계가 넓지 않다. 지금까지도 연락하는 지인은 모두 내 테스트 혹은 기준을 통과한 사람들이다. 정말 감사한 존재들. 그 사람들 만으로도 삶을 영위하는 데 부족함은 없으나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마음으로 타인을 너그러이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너그러움을 키우는 2024년, 아린이가 깨달음을 주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적어도 싫어하는 것부터 시작하지는 말자. 조카를 향한 것만큼의 애정은 아닐지라도 일단 ‘비호’ 딱지를 붙이고 그 사람이 ‘별로인 근거‘만 찾으려 애쓰지 말자. 같은 사건도 내가 좋게 보면 좋은 일이 되니까. 좋은 이유를 찾는 일은 행복하지만 싫은 이유를 찾는 일은 나도 피곤한 일이니.
다시 돼 내는 말, ‘오히려 좋아.‘
나아가 ‘그래서 좋아.’
더 나아가서는 ‘그냥 좋아.’
오늘 트레드밀은 Jay Park ‘좋아’를 들으며 뛰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