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 향기 Oct 26. 2024

길었던 하루

한동안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우선 심신이 너무 지쳤다. 불면증에 시달리다가 불면증이 어느 순간 극복되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저렴한 단가에 영양 한가득, 집에서 뚝딱 만들기 어려운 반찬들이 한가득 나오는 급식마저도 맛이 없어졌다. 그저 조금 먹히는 거라곤 신 음식, 매운 음식이 다였다. 아마 갱년기 증상들이 하나 둘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거의 한 달을 예전 먹던 양의 1/3밖에 안 먹고사는데 체중은 줄지도 않고 소식으로 인한 어지러움증만 동반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도 못 자는 것보단 못 먹는 게 훨씬 낫다. 이미 축적된 지방이 많아서 큰 일 없이 살 수 있으니까. 못 자면 정말 괴롭다. 낮에 쏟아지는 잠에 업무가 불가능하고 곤두선 신경에 아이들을 편안한 마음으로 대하기가 힘들다. 일하지 못하고 헤매고 있는 나를 자책한다. 마음이 너무 불편해진다.

또 다른 이유는 브런치 속 수많은 작가들 속에서 점에 불과한 나의 볼품없는 글쓰기가 싫었던 탓이다. 난 어떤 의미에선 잘못 자랐다. 잘하고 있는 나도 깎아내리기 바쁘고, 전교 1등을 해도 이전에 전교 1등 하던 아이가 이번에 공부를 안 해서이지 내가 잘해서가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아이였다. 조금은 나를 올려줘도 되는데 늘 깎기 바쁘다. 과일이건 채소건 많이 깎을수록 양분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데, 나를 지탱해 줄 양분들을 그저 없애버리기 바쁘다. 햇빛과 흙의 양분을 먹으며 수많은 벌레들을 견디며 잘 자라온 상황을 대견하게 여기지 못한다. 그저 햇빛과 흙 덕분이라고만 생각한다. 자라온 환경 탓에 나를 좀 내세울 줄도 모르고 자신감이 부족하다. 물론 여기엔 더 잘나고 싶은 마음도 한몫한다는 것도 안다. 어찌 됐든 별로 잘 자란 거 같지는 않다.(이것도 나를 까는 거긴 하네.)




늘 반복되는 일상 끝에, 아니 나한테만 늘 반복되는 아들과의 전쟁 같은 일상이 되풀이되면 집에 들어가기가 싫다. 아들이 종일 버티고 있는 집에 들어서는 순간 숨이 막힌다. 내 청춘을 바쳐서 남편과 함께 열심히 일하고 마련한 내 보금자리이고(우리는 결혼할 때 전세금 1원도 도움받지 못했다. 양가 부모 누구에게도), 이 보금자리가 너무나 뿌듯하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공간인데 들어가기가 두려워진다. 사람이 들어서면 티브이를 보다가 현관으로 바람이라도 들어온 양 나를 그냥  쓱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아들, 말 걸기가 힘든 상황, 어쩌다 티브이를 보고 있으면 그 딴 프로나 보고 있다는 비난. 내 집이니까 내가 맘껏 쉴 수 있는 곳이어야 하지만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기가 힘든 날들이 있다.


학교도 갑갑하고 조퇴를 하고 교문을 나섰다. 감히 조퇴를 상상하지 못하던 나는 올해 유독 조퇴를 많이 한다. 학교도 집도 발붙이기가 힘들다. 학교와 집 사이 어떤 제3의 공간이 있었으면 하고 상상한다. 판타지 영화 속 문을 열면 나오는 제3의 공간.

며칠 쌀쌀했는데 바람은 잦아들었고 햇살은 강해졌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적당하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완연한 가을 기운이 마음을 괴롭힌다. 누굴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후배에게 전화를 돌렸더니 와서 자고 가라고 하지만 속옷이라도 챙기러 집에 들어가야 되니 이내 포기하고 동네 도서관으로 향했다. 대구에 살 때 동네에 큰 도서관이 있었다. 1,2층은 열람실로만 되어 있어서 새벽부터 공부하는 학생들로 가득했고 3층은 큰 규모의 자료실로 퇴직하신 선배선생님들(교육청이나 연수를 갔을 때 스치듯 얼굴만 뵈었던 선생님들. 난 사람 얼굴을 정말 잘 기억한다.)이 일간지를 읽기도 하는 모습을 종종 보곤 하는 곳이었다. 그분들을 보며 나도 저렇게 살아야지 하던 게 10년이 넘어가고 있다. 이렇게 고향의 흔적을 떠올리면 지금이라도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진다. 

우리 동네 도서관은 그만큼의 규모도 아니고 자료실과 열람실이 공존한다. 열람실에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앉아서 책 읽기도 괜찮다. 넓은 책상에 앉아 창 너무 건물들을 바라본다. 가만히 서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나무들과 건물들. 나는 두 다리를 움직일 수도 있고 몇 년 안 된 성능 좋은 차도 있고 어디든 가면 되건만 혼자서 훌쩍 떠나지 못하는 나도 싫어지는 순간이다. 



김정운 교수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나란 인간은 생각할 수 없는 독특한 사고에 매료되었었다.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는 책을 읽어나간다. 교수직을 버리고 일본에 가서 전문대를 졸업하고 그림 공부도 하고 계신다. 역시 독특하다. 저런 사람이 친구였으면 좋겠다. 그러면 나에게 뭔가 새로운 방향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이끌어줄 것만 같다.

최근에는 김영민 교수의 책도 읽고 있다. 이 분도 독특하다.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는 책을 전자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종이책으로 대출했다.

두 분 다 배운 분들이라 다방면의 지식으로 썰을 풀어놓는다.

못 배운 아니 안 배우고 안 익힌 나는 그 두 분의 책을 읽으며 감탄한다. 그리고 또 한 번 좌절한다. 내 글은 글이 아니었구나. 알고 있긴 하지만 그저 일기일 뿐이구나. 또 한 번 좌절한다.

두 연인은 공부를 하다가 자리를 뜬다. 병원행정학이라는 책 표지가 보인다. 취업준비에 열심인 연인들. 목적이 있으면 힘들지만 생각이 없어지지. 저 청년들은 목적이 달성된 후의 허무함을 어떻게 견뎌나갈까 쓸데없는 오지랖으로 그들의 인생에 내 인생을 대입시킨다.



집으로 향한다. 지근거리 동네이지만 못 보는 상가들이 눈에 띈다. 사라지고 다시 생긴 가게들. 폐업으로 임대종이가 붙은 가게들. 성대하게 개업식을 했지만 앉아 있는 사람 하나 안 보이는 식당. 다들 참 먹고살기 바쁘구나. 작지만 꼬박꼬박 나오는 월급에 감사해야겠거니 생각한다.

상가 창들에 비친 내 모습. 처음 살 때 맞춤옷이었던 것 같았던 트렌치는 이제 뭔가 어색하다. 불룩히 나온 배, 딱 맞는 어깨. 살이 붙은 턱 때문에 커져 버린 얼굴.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 때면 20대의 내 모습을 상상하지만 이내 무너지는 현실. 시대의 아이콘이었던 그렇게나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이승연도 아줌마가 됐는데 네가 뭘 기대하니? 하지만 최지우는? 여전히 이쁜 걸. 짝퉁 최지우 소리도 어쩌다 한 번 듣던 내가(그냥 이미지 때문이다. 어디 감히 최지우한테 나를 갖다 되겠나. 키가 최지우랑 같고 최지우만큼 말랐었기에 머리가 길었기에 듣던 말일뿐) 세월 속에서 이렇게 변해버린 걸 받아들여야 되는데, 운동 한 번 안 하고 살면서 뭔 착각은 아직도 그렇게 많은 건지. 운동하면 예전 같아지겠지라는 망상 속에서 살고 있다. 절대 불가능하다. 망상하다가 정신병 걸릴라. 그만하거라.

운동을 해야겠군 생각하지만, 이 결심도 또 내일이면 잊히고 없을 것이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려고 한다. 집에 와서는 또 반복이다. 그냥 화를 내고 싶어서 화를 내는 아이 같다. 뭐가 조금만 틀어지면 엉망이 된다.

나의 하루 마무리는 또 평온하지는 못했다. 

아들이 저러다가 조현병이라도 될까 겁도 난다.


좋았던 기억이라도 붙들고 살아야지 어쩌겠는가. 현실의 나는 보잘것없지만 그 기억들로라도 살아갈 수 있다면. 어지럼증과 헛구역질 등 알 수 없는 증상들이 계속되지만 죽을병에 걸린 것도 아니고, 내가 조금 허술해도 월급은 받을 수 있는 직장도 있고. 나를 위로해 주는 형제들도 있고.

이렇게 도움도 안 되는 글이지만 쓸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준 브런치도 있고. 브런치도 재수하는 사람도 있는데 난 한 번에 통과됐어라는 작은 위안으로도 살아갈 수 있어서 다행이다.


주저리주저리 뭔 말도 많았다. 다시 읽고 싶지도 않다.

원래는 돈을 왕창 날린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어쩌다가 하루 일과를 쓰게 되었다.

<끝까지 읽으신 작가님과 독자님께는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기 연민은 멀리 던져버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