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무너졌다.
호기롭게 시작한 산책 삼일 만에.
토요일 오전 산책을 끝내고 집에 왔는데 팔이 저리기 시작하더니 다리도 저려오기 시작한다. 오한이 든다. 또 원인을 알 수 없는 몸살의 시작이다. 10월만 해도 3번이나 갑자기 열이 나기 시작해 조퇴와 병가를 반복했는데 11월이 시작된 지 2일 만에 또 증상이 시작되었다.
체온을 재 보니 38도가 넘어간다. 병원이 문을 닫은 시간이고 해열제를 먹고 두꺼운 겨울 이불을 덮고 자리에 누웠다.
그렇게 또 하루를 꼬박 아프고 나니 편안해졌던 마음이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열심히 모래성을 쌓았는데 속절없이 파도에 무너지는 것처럼.
모래성은 무너질 것을 예상이라도 하고 쌓지만 내 몸은 예측도 불가능하다.
와르르 무너지는 건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함께다.
그러려니 받아들였는데, 언젠가는 달라지겠지 받아들였는데, 아들이 목구멍에 필터라도 끼운 듯이 유독 아빠와 나한테만 다른 톤의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진다. 아슬아슬 충돌을 피해 간다. 일관성 없는 나의 모습에 실망이 인다.
온갖 상념들이 마음을 헤집는다. 결혼과정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이 빠르게 지나간다. 아이를 낳았을 때 작은 생명을 안고 어찌할 바를 몰라 어정쩡하게 웃던, 그 뒤에 숨겨진 생명에 대한 감동은 뭐라 표현할 수 없어서 어정쩡했던 남편의 표정도 떠오르고, 대구 사투리를 써가며 나에게 조잘대던 아이의 웃는 얼굴도 떠오른다. 갑자기 슬퍼진다.
근데 이것도 잠깐이다.
아들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밥 줘라는 말을 하는 순간 내 속의 다른 인격이 발동한다.
아픈 엄마에게 친절하지 못한 아들과, 그런 아들을 편견 없이 바라보지 못하는 엄마는 또 충돌한다.
이 정도 몸살이 뭐 대수라고 서러워질 건 뭔지.
잘 살아가려면 마음속에 있는 낡은 것들을 하나 둘 정리해 가야 된다. 서랍 속 케케묵은 옷도 정리 못하는 내가 마음속 낡은 것들을 하나 둘 정리하기가 쉽진 않은 모양이다.
버려야 될 것이 너무 많다.
낡고 부정적인 기억들, 외로움, 미워하는 마음, 미움이 켜켜이 쌓여 굳어버린 절망과 화.
비워내지 않으면 절대 채울 수가 없다.
사랑의 마음도, 좋은 순간의 기억도, 미래에 대한 희망도.
점점 쇠퇴한 가는 기억력이건만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매일매일 느끼건만 과거의 기억은 너무나 뚜렷하다. 영어 단어 외우듯 복기하고 되씹고 반복하고 있어서다.
생각이 날 때 고개를 흔들자.
꽉 찬 지메일 스토리지를 정리를 위해 메일함도 싹 비우고 불필요한 동영상도 싹 지웠다.
반 아이들의 모습을 찍은 동영상을 지우면서 아쉬워하는 나를 바라보게 된다.
결국 보지 않을 것들에 미련이 너무 많다.
싹 지운다.
내 마음도 비우고 지우고 채울 준비를 하자.
오늘은 그런 마음으로 수행평가를 위해 거두었던 책을 검사했다. 2주 동안 쥐고만 있었다. 검사하고 나니 교실도 깨끗하고 홀가분해지건만 미루고 또 미루었다. 칠판 밑이 정리되니 마음도 홀가분하다.
내 마음의 잡동사니들도 갖다 버리고 정리해야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다.
힘을 내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