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년 선생님 한 분이 병가를 내셨다.
마지막 정리를 하는 분에게 인사를 하러 갔더니 얼굴이 너무 환하다. 학기 초에 봤던 환하디 환한 미소를 지으신다. 기쁨이고 희망이 되어야 할 아이들이 절망이 되고 괴로움이 되어서 안타깝다. 내일부터 아이들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서 행복할 것이다. 어쩌면 선생이 그럴 수가 있냐고 하지 않길 바란다. 교실엔 25명이 주는 기쁨을 능가하는 3,4명이 존재한다.
나도 병가를 내고 싶었다.
정신적인 힘듦은 표가 안 나서 버티고 견디지만 결국 몸도 망가뜨릴 게 분명하다.
하지만 결단력이 없는 나는, 미래를 걱정하는 나는 2년 뒤면 타시군으로 나가야 되기 때문에 근평을 위해 이동 점수를 위해 병가조차 못내고 있다. 지금 이 선택을 나중에 또 후회할지도 모를 일이다. 살아보니 TA을 가든 SS을 가든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성인이 되어 가지만 그 때라도 아이를 챙기는 게 맞았네라고.
남편과 둘이 몇 년을 모아야 될 돈을 3년의 기다림 끝에 한번에 날리고 나니 돈에 대한 미련도 없어졌다. 주변 사람들 중에는 보너스가 나오면 나를 위해 쓴다는 사람도 있던데, 십원단위까지 탈탈 털어 저금했던 일들이 의미가 없어져버렸다. 결혼 이후 10년 이상 계속 쓰던 가계부도 자금 상환이 안될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 재작년부터 멈춰버렸다. 지난달에는 엄마 안마 의자도 사드렸고, LED가 깨졌는지 주먹만한 뿌연 동그라미가 그려지던 텔레비젼도 대형으로 바꿔버렸다. 피부과에 가서 목돈도 결제했다. 더 이상 돈을 모으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살아라, 아껴 살아라, 미니멀 라이프, 종잣돈을 모아라, 10만 시간의 법칙, 꿈꾸면 이루어진다 등등. 나를 채찍질하는 말들은 널리고 널렸다.
꿈만 꾼다고 될 일도 아니고, 부서져라 노력한다고 다 금전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다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돈 없어도 사랑이 있어 행복한 사람도 있고, 부모 덕 보고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내가 예상치 못한 일은 널리고 널린 게 세상이다.
그렇다고 어쩌랴. 복잡한 세상의 법칙을 한정된 시간 안에 나 혼자 다 겪고 깨닫고 살 순 없는 일이다. 어찌되었든 내 가치관대로 살 수밖에 없고 그렇게 살 것이다. 다만 이제는 후회는 조금 덜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다.
이렇게 쓰다가도 이젠 다시 모아야겠구나 생각하는 날도 올 것이고, 반을 들었다 놨다 하는 아이들도 자라면서 괜찮아질 것이라 깨달으면 얼굴 찡그리며 말하고 동료와 열변을 토하며 고민할 필요도 없다. 나도 컨트롤하지 못하면서 아이들을 고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버린다면 조금은 편안해 질 것이다. 아들도 자기 인생을 살 것이라고 믿어주면 내 마음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미움과 사랑의 반복도 희석될 것이다.
울고 자면 어떻고 웃으며 마무리하면 어떻고, 이런 하루도 저런 하루도 나의 하루일 뿐.
막 좋을 필요도 없고 아주 울적해질 필요도 없다.
많이 미워할 필요도 지나치게 사랑할 필요도 없다.
너무 애쓸 것도 손을 놓아버릴 일도 아니다.
일렁임이 없을 수는 없으니 잔잔한 물결만 일렁이도록 편안하게 편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