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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규 Nov 17. 2020

악질 광고주들

언젠가 교수들이 뽑은 광고상 시상식이 있었습니다. 행사 진행 도중 정회가 됐습니다. 상을 받기로 예정된 광고주 한 사람이 약속시간에 늦었기 때문입니다. 큰 결례가 아닐 수 없었지요. 수백명이 수 십 분을 기다린 끝에 그가 도착했고 마침내 시상이 끝났습니다. 


사건은 광고주가 퇴장하던 순간에 일어났습니다. 뭣 때문에 기분이 나빴는지는 몰라도 회의장을 빠져나가던 그가 상패와 함께 받은 축하꽃다발을, 수행직원 품에 거친 몸짓으로 내팽겨 친 것입니다. 수백개의 눈이 훤히 지켜보는 가운데. 


장내가 크게 술렁였습니다. 오랜 시간을 참고 기다려줬던 참석자들의 입에서 동시에, 기가 차다는 개탄의 한숨이 터져 나온 것입니다.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명색이 교수들이 모인 학회에서조차 저리 안하무인인데, 자기회사 광고를 대행하는 광고회사 사람들은 대체 어찌 대접할까 싶었던 게지요(결국 나중에 언론에 오르내리는 대형 사고를 치더군요). 


광고회사 사람들은 농반 진반으로 광고주를 ‘주님’이라 부릅니다. 회사 경영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것이 그들이기 때문이지요. 광고회사 수입의 대부분은 광고주가 매체에 집행하는 비용의 일정부분을 되돌려 받는 대행수수료에서 생깁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나라의 경우 광고회사를 파트너로 존중하는 신사적 매너가 유난히 부족하다는 것이 중평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하인 취급이고 좋게 말한다 쳐도 하청업자 취급이지요. 제가 현업에 근무하던 시절 소문이 자자했던 두 악질 광고주의 케이스. 첫번째는,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광고회사 앞 맥주집으로 광고주 담당(AE로 불리는) 직원을 불러내어 술을 사내라던 인간. 두번째는, 제 취미인 민물낚시 가는데 꼭 AE보고 차 몰고 나와서 동행하라던 인간. 


위의 사례는 쪼잔한 경우지만, 엄연한 업무파트너들의 전문성과 인격을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모욕하는 광고주 직원과 오너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스트레스가 오죽하면 "광고쟁이"들의 평균수명이 10살 적다는 무시무시한 통계가 나돌았을까요. 


광고회사와 광고주의 관계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미국의 전설적 광고인 레이먼드 루비컴(1892-1978)입니다. 그는 과학적 조사결과와 작품의 창조성을 결합시킴으로써 광고사에 큰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후배 광고인들이 그를 위대한 인물로 기억하는 이유는 평생 동안 광고인으로서 자존심과 도덕성을 지켜냈기 때문이었습니다. 


루비캄은 “직원들 사기를 떨어뜨리는 광고주는 아예 포기하는 게 좋다”는 철학을 지녔습니다. 도덕적 문제가 있는 광고주는 아무리 광고비가 많아도 영입을 거절하는 것으로 유명했습니다. 심지어 기존에 대행을 맡고 있던 거대 광고주를 자발적으로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1930년대 미국에서 가장 광고를 많이 집행한 기업들은 담배회사였습니다. 그중 럭키스트라이크 브랜드를 팔던 아메리칸 담배회사(American Tobacco Company) 사장 조지 워싱턴 힐과 얽힌 인연이 그랬습니다. 힐은 눈을 휘번득이는 편집광적 행동거지에, 팔을 휘두르며 사무실을 으스대고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 성격이었습니다. 특히 광고회사에 스스로의 괴팍하고 독단적 창작 스타일을 악착같이 강요했습니다. 그는 늘 남을 욕하는 습관이 있었고, 즉흥적으로 담당 광고제작팀을 교체하는 것이 버릇이었습니다. 


마침내 네 번째 담당 팀을 바꾸라는 요구를 받은 순간 루비캄은 다음과 같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궁핍해도 이따위 요구는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어. 뭣보다 우리 회사가 지금 그만큼 궁하지는 않잖아?”


힐을 방문한 루비캄은 주저 없이 3백만 달러짜리 광고주의 대행을 스스로 포기하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하면 5천만 달러(600억원) 이상이었지요. 이 소식이 전해지자 뉴욕 메디슨 애비뉴의 광고회사 <영 앤 루비캄> 사무실 곳곳에 축하주가 돌았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직원들이 복도에 나와 감격에 겨운 춤을 추었습니다. 이 희대의 악질 광고주 때문에 그동안 직원들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가를 증명하는 사례였지요. 


예나 지금이나 루비캄처럼 대찬 광고인은 드뭅니다. 그러나 시대를 막론하고, 업계에 소문이 짜한 악질 광고주들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특히 봉건적 ‘갑을 관계’가 21세기에도 큰 힘을 발휘하는 이곳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고개만 쓰윽 둘러보면 사방에서 발견할 수 있는 그들이야말로, 이 나라 자본주의의 천민적 특성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존재들입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 집행된 럭키스트라이크 광고입니다. 모델은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스타 게리 쿠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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