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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Sep 24. 2020

꼰대와 괜찮은 상사의 사이

그 어디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올해는 물 건너간 줄만 알았던 신입사원을 예정보다 빠르게 맞이했다.

신입 팀원은 무려 스물네 살이다. 이전까지 기획자는 늘 경력직으로 채용했기 때문에, 이렇게 어린 나이의 직원이 들어온 전례가 없었다. 하물며 직전에는 팀장인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들이 팀원으로 들어올 정도였으니까. 우리는 스물넷의 (아직 대학교 졸업장을 받기도 전인 )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하는 직원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런 무지함은 신입 직원의 첫 출근날부터 나를 시험에 들게 하였다.

-팀장님, 왜 막내라고 해서 커피머신 정리를 해야 하나요? 먹는 사람이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다. 우리 사무실은 현재 막내 직원이 출근해서 커피머신 정리를 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하는 일을 적어보자면 커피머신 전원을 켜고 물을 새로 채워 넣는 것, 가득 찬 원두찌꺼기를 쓰레기 통에 버리는 것, 물을 담아두는 컵 하나를 씻어 놓는 것으로 공용으로 쓰고 있는 커피머신을 사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것이었다. 

그러나 더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막내만의 일은 아니다. 커피머신은 직원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사용하기 때문에 아침에 한 번 정리한다고 해서 끝나는 일이 아니고 각자 알아서 그때그때 정리하는 편이다. 그렇지만 그녀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은 듯했다. 이미 ‘막내라서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것 자체를 무척 부당하다고 여기는 것이 표정에서부터 전해졌다.



물론 나도 그 자리에서 바로 반박할 수는 있었다. '회사 생활은 원래 그런 거야.' '어떻게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겠니.' 그런 고리타분한 소리 말고... 우리는 작은 회사라 업무 외에 모두 부캐(부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디자이너 A는 회사의 생활비품을 관리하고, 영업직원 B는 회사의 모든 컴퓨터 및 프로그램 관리를 한다. 그렇게 다들 업무 외에 귀찮은 혹 하나씩을 달고 있지만 그걸 불평할 수는 없다. 별 것 없어 보이는 작은 일도 누군가는 해야 이 작은 회사가 불편 없이 굴러간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회사 안에는 누군가가 해주어 고마운 일들이 산재해 있기 마련이다. 커피머신을 정리하는 일 역시 ‘막내라서’는 아니고 그저 ‘막내가 해주어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을 아마도 처음 맞닥뜨렸을 막내의 분노가 영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어서 나의 으마으마한 꼰대력 보여주기는 일단 미뤄두기로 했다.



예상치 못했던 발언이기는 했으나 어쨌건 나는 회사 차원에서 다 같이 생각해볼 일이라고 판단했다. 나 역시 ‘커피 머신 정리’를 여태껏 계속 막내가 해왔다고 해서 그것이 막내의 일이 맞다고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나 혼자 판단해서 말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므로 고민해보겠다고 한 뒤 돌려보냈다.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


그때부터였다. 나는 이 스물넷의 뉴 페이스에게 받은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며칠간 많은 이들에게 면담을 요청해야 했다. 전임 막내와 그 팀의 팀장, 그리고 대표님을 포함한 나의 상사들까지.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는 했지만 어느새 이것 역시 내 부캐가 해야 할 일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31번째 부캐인 '왕언니'가 있다) 그렇다면 받아들여야지. 

 

 

결론적으로 각자 다른 위치의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던 시간은 나에게 무척 유의미한 시간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같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아무도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런 일이 논의되는 것 자체를 불쾌하게 여겼고 누군가는 고민해볼 문제 기는 하나 바꿀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바꿀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주었고 다른 누군가는 무관심했다. 

혼나기도 했다. 신입이 출근 첫날 내뱉은 말에 그렇게 휘둘리면 어떡하냐고. 그건 좀 발끈했다. 휘둘린 게 아니라 이해했기 때문인데요. 내가 그 마음을 이해해버렸는데 어떻게 그 말을 무시하냐고요. 바뀌지 않더라도 아직 어린 막내의 마음이 다치지 않을 수 있게 최소한의 노력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요. 누구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기꺼이 수고한다는 데 왜. 뭐.

 

 

결론을 말하자면,  ‘커피 머신 정리’는 여전히 막내의 일로 남았다. 별거 아닌 일 같지만 무 자르듯 딱 잘라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다 써내려가자면 지루할만큼 긴 서사로 얽힌 이전의 막내와 그 이전의 막내들의 이해관계가 있었고(이거 엄청 진지한 문제였다.) 내가 나서서 방식을 뒤엎는 것에 대해 기획팀에만 특혜를 주냐는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막내는 막내의 일에 대해 반기를 들었지만 막내의 일은 비단 막내만의 일이 아니었다(?). 꽤나 중대 사안이었다.

 


그렇게 나는 아직 어렵기만 한 스물넷의 막내 사원님을 앞에 두고, 최대한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야 했고 당장 바꿔줄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나는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제야 막내는 웃어 보였다. 어쩜. 웃으니까 귀엽잖니, 얘.

그녀는 본인도 출근 첫날 무작정 질러버리고 마음이 불편했는데 그 말을 흘려버리지 않고 이해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말했다. 좋은 상사를 만난 것 같다고. 그리고 며칠간 회사에서 지내보니까 어떤 말씀하시는지 알 것 같다는 기특한 말을 했다. 그땐 ‘막내가 해야 하는 일’에 꽂혀서 별 거 아닌 걸 너무 크게 생각한 것 같다고… 그녀는 민망해하며 말을 줄였지만 나는 그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전보다는 덜 하긴 하지만 분명히 우리 사회는 ‘막내’라는 이름 아래 많은 부당한 것들을 당연하게 요구하고 있으니까. 누구나 막내 생활은 서러운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서러워야 하지? 가장 좋았던 시절일 수는 없는 걸까?

 


앞으로 회사생활하면서도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을 경우에는 언제든 말하라는 가식적인 멘트로 마무리를 했다. 속으로는 그땐 또 어떻게 하지 벌벌 떨면서. 

대신 다음에는 충분히 고민하는 시간을 가진 뒤 말하기. 그렇게 훅 들어오면 내가 너무 놀라버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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