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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Mar 13. 2019

 PPL이 대체 뭐길래 나를 울리나.

알고보면 짠내나는 드라마 속 PPL



 얼마 전 종영한 'SKY캐슬'을 보다가 홍게살이 듬뿍 올라간 죽을 먹고 싶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거다.

그럼에도 한서진을 비롯한 내로라하는 집 아줌마들이 본죽에서 브런치를 즐긴다고?

너무 억지잖아-했던 것도 나뿐만 아니었을 테고...(그런데 알고보니 이건 양반이었다. 이젠 재벌가 상견례를 '돈까스 클럽'에서 한다. 이놈의 PPL)


이거 저만 먹고 싶었던 거 아니죠. (JTBC드라마 'SKY캐슬' 한 장면)


인기 있는 드라마에서 빠짐없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고백신이나 키스신을 능가하는 장면.

남녀 주인공이 서브웨이에서 샌드위치 먹는 씬이다. 내가 보는 드라마마다 주인공들은 서브웨이 샌드위치를 참 좋아한다. 밥먹는 건 안나오는데 샌드위치는 회마다 빼놓지 않고 먹는다.

잘생긴 남자와 예쁜 여자가 먹는 샌드위치는 뭔가 다른가? 왠지 좀 더 맛있어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다음날 점심이면 서브웨이에 달려가고....


이것도 저만 먹고싶었던 거 아니죠. (KBS드라마 '태양의 후예' 한 장면)



네. 여러분, TV가 이렇게 무섭습니다! 




PPL (Product Placement) 
특정 상품을 방송 매체 속에 의도적이고 자연스럽게 노출시켜 광고효과를 노리는 것


대부분 PPL 하면 부정적인 반응들이 많다. 한창 드라마에 몰입해 있는데 갑툭튀 하는 상품들, 로봇인가? 싶을 정도로 맥락이 어색한 칭찬 멘트. 이거 보려고 일주일을 꼬박 기다렸는데 그따위 PPL로 드라마 흐름을 다 끊어 먹으면 시청자 입장에서 불만이 터져 나오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여기, 그 PPL을 어떻게든 욱여넣어야하는 미션을 부여받은 사람이 있다. 회사에서는 광고주 리스트와 조건을 들이밀며 대본에 녹이라고 말하고 작가는 이 정도가 최선이라 말하고, 광고주는 이걸로는 돈 못준다고 압박하고 또 방송국은 이거 방송에 못나간다며 난리를 친다. 그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 사람은 어떨까. 그래 바로 나. 나는 어땠을까?



어떻긴 뭘 어때. 잊지 못해.
나를 개고생 시키던 PPL



드라마를 제작하는 데 있어 PPL이 없다는 건 불가능하다. 왜냐. 방송국이 제작사에 제작비를 100% 주지 않기 때문이다. (방송국은 제작사에 슈우퍼 갑이다.) 실제로 소비되는 제작비의 60-70% 정도만을 지급한다. 그러면 나머지는 어디서 충당해야 할까. 

바로 PPL을 통한 광고비이다. 그래서 제작사는 PPL 유치에 사활을 걸 수밖에 없고 또 광고주는 드라마가 대박 나면 광고효과가 수직 상승하니 큰돈을 내더라도 들어가려고 한다. 

특히나 유명 작가, 연출의 작품이거나 출연 배우가 톱클래스라든가. 대본이 재밌기로 소문이 자자하다든가. 

그러면 더욱 치열하게 너도 나도 광고 넣겠다고 줄을 선다.

한마디로 PPL은 제작사와 광고주가 상생할 수 있는 연결고리다.


그러니 물론 시청자 입장에서는 

'결국 저 갑툭튀 하는 장면을 봐야 하는 내가 불쌍하지. 방송국 놈들은 좋은 거잖아?' 

할 수 있다. 할 수 있는데...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PPL 때문에 나도 울고, 작가도 울고, 광고주도 울었다. 



고백한다. 내가 진행했던 드라마는 시청률이 굉.장.히 낮았다. 시청률이 20%를 넘어가던 상대작들에 밀려 화제성도 물론 없었다. 그래도 다행히 PPL은 들어왔다. 자동차, 카페, 전자기기 등...

광고가 들어올 땐, 조건들이 붙는데 이 조건이라는 것이 생각보다 큰 영향력을 가진다. 이젠 다들 알다시피 때때로 드라마의 흐름을 쥐고 흔들기도 하니까. 그리고 바로 이게 문제다.



보통의 PPL은 노출 횟수가 중요하다. 미니시리즈 16회 기준으로 8회 노출, 노출 인물은 어느 선까지- 

이게 또 1회 차에 2번, 3번 나온다고 해서 중복 카운팅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니 부지런히 상품 노출을 위해 마케팅 담당자는 기획PD를 쪼고, 기획PD는 작가에게 빌고, 작가는 그래도 기를 쓰고 대본에 욱여넣는다. 



그나마 전자기기나 카페의 경우는 노출이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핸드폰이나 카메라 등 실생활에서 많이 사용하는 제품들이므로 대본에 끼워넣기도 어렵지 않고 크게 흐름을 해치지 않으니까. 카페 또한 주인공들의 대화 배경으로 쓰이기에 어색하지 않다. 

"커피나 한잔 할까요?" "카페에서 잠깐 보죠." 

라는 대사는 요즘처럼 100m마다 카페가 있는 세상에 그리 튀지 않기에.

그러나 모든 PPL이 이렇게 수월하지는 않다.

아니 대부분 어렵다. 





한번은  A 외식업체가 광고주로 들어왔다. 광고주 중에 꽤 큰 금액으로 들어왔고 단순 노출이 아닌 에피소드형 간접광고 형태를 원했다. 

단순히 제품을 보여주는 게 아니고, 대사도 "맛있다!" 정도에서 끝내는 게 아니고! 제품의 광고 포인트를 가지고 하나의 에피소드로 만들어달라는 것이 조건이었다.

광고주 입장에서야 우리가 돈을 많이 줬으니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넣어주면 되지 않냐 하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게 되지 않는 게 문제다.

통과해야 할 허들이 너무 많단 말이다.


어려운 건 알지만 그래도 뛰어보자!


자, 첫 번째 허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드라마 흐름을 방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전까지 없던 이야기가 갑자기 등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후 이야기도 자연스러워야 하므로.

일단 이 부분을 가장 신경 써야 한다. 그러기 위해 기획PD는 언제나 두뇌 풀가동 모드.

작가들이 대본에 PPL 관련 사항을 반영하기 쉽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해야 한다. 안그래도 대본쓰기 바빠 죽겠는데 PPL까지 알아서 해달라고 맡겨버리면 그건 뭐. 방송 펑크내겠다는 것과 같다. 작가와 기획PD는 충분한 논의를 거치며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광고주의 니즈를 반영한다. 

으쌰 으쌰. 허들 하나를 넘었다. 



그런데 나타난 다음 허들이 무슨 한라산마냥 겁나 높다. 

시간이며 에너지며 다 쏟았는데, 광고주 쪽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단다.

'이렇게까지 했는데? 대체 왜?' 

아예 드라마 한 회차의 메인 에피소드가 자기네들 상품 위주였으면 좋겠는 거다.

말도 안돼! 미친 거 아니야? 하겠지만 실제 겪은 일이다. 광고주들은 일단 돈을 냈으니 그만큼 뽕뽑고 싶어 한다. 무조건 많이 노출해달라. 좋은 말을 많이 넣어달라 요구한다. 이 정도는 양반이다.

아예 본인들이 생각하는 내용 및 원하는 대사까지 보내온다. 이대로 해달라고.

갑자기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인물들간의 대사는 모두 제품을 향한 찬양이다. 진짜 울고 싶어진다.

드라마에 대한 이해나 퀄리티는 중요하지 않으니 당연히 제대로 된 내용 일리 없고 흐름에 맞을 리도 없고...

중간에 낀 기획PD와 대본을 집필해야 하는 작가들만 멘붕이 오는 거다.

어떻게든 당장 대본은 나가야 하니 어쩔 수 있나. 못 넘을 거면 돌아라도 가야 한다. 



그런데 세 번째 허들. 정말 강적이다. 돌아갈 길이 없다. 감독의 컨펌이기 때문이다.

촬영에 있어 모든 것은 감독의 컨펌이 필요한 부분이라 다른 길이 없다. 특히 감독의 경우 방송국 소속이다 보니 PPL이 못마땅한 경우가 많다. 컨펌받기도 쉽지 않다. 

정공법을 들이대 본다. 제작사 대표가 한 번씩 전화를 돌리고 마케팅 담당자도 현장에 나가 최대한 어필을 한다.

글로 쓰니 담백하지만 정말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과정이다.

우여곡절 끝에 간신히 기어서 허들을 넘어 간다.



앞에 결승선이 보인다! 이제 다 왔구나. 

크게 숨을 몰아쉬고 다시 달려보려고 하는데 뭐지?

어떤 놈이 나한테 발을 거네?

심의라는 놈이다.


뭐야 다 왔는데, 누구야.


방송사마다 간접광고에 대한 심의를 진행한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대본부터 터치해서 편집 과정에서 삭제하기도 했다. 

고생 고생해서 촬영까지 하면 뭐하나... 잘리는데. 

이렇다 보니 제작사 입장에서도 광고주 입장을 최대한 반영을 하려 하지만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A 광고주와 이런 식으로 진행을 했다.

지난한 과정을 겪어냈는데 결국 제작사, 광고대행사, A광고주 중 어느 곳 하나 웃지 못했다.

내부 직원들끼리도 고성이 오갔고, 서로 책임을 미뤘다. 집중해도 모자랄 판에 PPL 때문에 자꾸만 대본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작가도 울고 돈은 크게 썼는데 생각만큼의 실적도, 효과도 보지 못한 광고주도 울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잘해보려고 아등바등거렸던 나도 숨죽여 울었고...

제 각기 놓인 상황이 모두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람들을 모두 한 길로 끌고 가려는 건 

3년 차 기획PD에게는 녹록지 않았던 걸까.

지금이라면 더 잘했을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땐 저렇게 아무도 웃지 못하는 슬픈 결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드라마에서 어이없는 PPL 장면을 보면 가슴 한편이 짠하다.

분명 나와 같은 사람 한 명 정도는 저 장면의 뒤에서 울고 있으리라. 



그리고 나는 아직도 A외식업체를 이용하지 않는다. 무지 뒤끝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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