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개 Mar 28. 2019

드라마 취재는 연예인보다 흥미롭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



"연예인 많이 보겠어요!"


드라마 제작사에 다닌다고 하면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맞다. 실제로 연예인 볼 일이 많다. 진행하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가끔 미팅 오는 연예인들도 있다. 애초에 내가 다닌 회사에 소속된 연예인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워낙 회사 주변에 각종 엔터사들이 몰려 있다 보니, 그냥 점심 먹으러만 나가도 연예인을 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 반응만큼 연예인을 보는 게 신기하거나 재밌지는 않았다. 오히려 누군가 나에게 기획PD 시절, 재밌고 흥미로웠던 걸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취재가 제일 재밌었어요."



취재 이야기를 써볼까? 하고 있었던 일들을 떠올려보니, 생각보다 3년간 다닌 취재가 꽤 많았다.

방영된 건 적었어도 준비했던 프로젝트는 워낙 많았으니까. '취재'라고 말을 붙이니 엄청 거창해 보이지만 그런 건 아니고, 등장하는 인물의 직업이나 배경 등에 필요한 소스를 얻기 위한 인터뷰라고 생각하면 된다. 의학드라마의 경우 있을 수 있는 에피소드와 법정 드라마의 에피소드는 다르고, 인물들이 가지는 특징 같은 것도 다 다르다. 이걸 취재 과정에서 뽑아낼 수 있다.



아무래도 드라마를 위한 취재이기 때문에 평범한 인물이나 배경보다는 조금 특별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만큼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다. 기획PD시절 힘들게 일했던 기억이 대부분이지만, 그럼에도 취재 에피소드들은 즐거움으로 남아있는 걸 보면.



드라마 취재는 보통 준비단계에서 작가들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진다.  대본을 쓰는 데 있어 극의 리얼리티를 살리기 위해 꼭 필요하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소재 거리를 찾을 수 있으니까. 작가나 우리 입장에서도 금맥을 찾아내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그렇지만 사실 기획 PD 입장에서 반가운 요청사항은 아니다.

왜? 귀찮으니까!



취재를 통해 작가는 얻을만한 게 많아야 하고 그런 취재를 준비하는 것은 대부분 기획PD의 몫이다. (쓰다보니 기획PD의 몫은 왜이렇게 많은가.) 흥미로운 부분인 만큼 쉽지 않은 부분이다. 취재할 곳이나 인물 섭외 등등 준비할 게 많고 후에 정리해야 할 것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재가 즐거웠던 것은 '내가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해볼 수 있을까?' 하는 일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절대 갈 일이 없을 곳을 다녀오고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내가 기획PD를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그래도 기획PD여서 좋았던 일들 중에 하나이다.



저는 열심히 들을 테니 당신의 모든 얘길 해줘요.






하루는 작가님과 보조작가, 나와 팀장 이렇게 여자 넷이서 늦은 밤, 청담동의 한 가라오케를 방문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아직도 생생하다. 청담동 일대가 시원하게 펼쳐지는 뷰를 레스토랑이 아닌 가라오케에서 볼 줄이야! (촌스럽지만 가라오케는 모두 지하에만 있는 줄 알았다.)

꽤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그때도 지금도 가라오케라는 곳 근처도 갈 일이 없는 나는 그저 입만 헤- 벌리고 구경하기 바빴다. 물론 어디까지나 취재차! 방문한 우리는 그곳에서 활동하는 DJ들을 만나기 위해 룸에 입성했다. DJ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그때의 나. 가라오케에서 팁을 받으며 노래하고 춤추는 이들을 DJ라고 불렀다. 당시 준비하던 드라마 주인공이 아이돌 연습생이었는데, DJ 대부분이 가수 지망생, 아이돌 연습생 출신이라는 정보를 듣고 대표님께서 마련해주신 자리였다.



우리는 남,여 DJ 몇 명을 차례로 만났다. 20대 초중반의 그들은 하나같이 앳된 얼굴에 인물도 좋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선뜻, 평소 서비스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각각 두세곡을 연달아 보여주었는데 이때,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마치 룸이 작은 콘서트장처럼 느껴졌다! 내가 상상했던 것과 크게 달랐다. 영화 속에서 보던 대충 분위기 맞춰주며 살랑 흔들어대던 아가씨들을 떠올렸는데...  노래며 춤이며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전문적이었고 내뿜는 에너지가 엄청났다. 하나같이 땀을 뻘뻘 흘리며 열정적으로 노래하고 춤을 췄다. 그때만큼은 가라오케 룸이 아닌 진짜 무대라고 생각하는 듯이!(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날 밤, 내가 있던 룸에서만큼은 그들이 BTS고 트와이스였다. (그저 비유적 표현입니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물개박수 (출처: kbs. 언니들의 슬램덩크)


내 월급으론 팁을 못주니까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으로 그들에게 정말 소소한(..)답례를 하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놀랬던 게, 당시 내 나이는 그들과 비슷했다. 어떻게 보면, 또래 친구와 이야기 나누는 자리였음에도 하나하나 모든 것이 달랐다. 내 주변은 다들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대학을 나오고 회사에 취업해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고 있었다. 내 삶의 울타리는 딱 그 정도로 정형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아예 다른 구역에서 아주 다른 모양의 울타리를 치고 살고 있었다. 삶에 대한 사고방식, 돈을 대하는 태도 등등 하나도 같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그 다른 것 투성이에서 같은 걸 발견했다. 그들 역시 나와 같이 치열한 20대를 보내고 있었던 거다. 저마다 각자의 사연을 안고 DJ로 살아가고 있었고, 그것이 비록 처음 원했던 방식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도 존재하는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당시 기획PD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역시 그랬다. 나의 부족함이 드러날까 늘 긴장했고 나름 열심히 공부했다. 모든 게 어설픈 사회 초년생이었지만 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서 발버둥 치던 시절이었다. 그들과 내가 별반 달라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나는 처음 그려진 세상에 눈을 뜬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존재 자체를 몰랐던, 이 일이 아니엇으면 아마도 모르고 지냈을 삶에서도 나와 같은 고민을 읽었고 불안을 공감했다. 그들은 나와 분명 다르지만 또 같았다. 그 생소했던 경험은 지금까지도 많은 의미로 기억에 남아있다. '타인의 삶에 대하여 내 잣대를 들이밀어 판단하지 말 것' 잘 지키고 있다는 말은 못 하겠지만 그날 이후로 깊게 자리 잡고 있는 하나이다. 배웠다고 말하기엔 좀 무겁고, 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 술값은 내 월급보다 많이 나왔고

몇 달뒤, 프로젝트는 엎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취재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났다. 탑모델을 만났고 그런가 하면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초보 모델도 만났다. 최정상의 작곡가, 유수의 광고제에서 상을 받은 광고인 등등. 그리고 일반인은 쉽게 경험할 수 없는 곳들도 갔다. 패션위크의 백 스테이지, 아이돌 제작자의 사무실 등등..  



당시엔 그들에게서 어떻게 하면 좋은 소재를 하나라도 더 뽑아낼까 고민하는 게 우선이었다.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어렵게 자리를 마련했는데 드라마에 쓸 거리가 안되면 손해라고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취재를 통해 나온 이야기 중에 드라마에 들어간 내용도 있지만 사실 아주 적은 부분이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이곳저곳을 다녀도 드라마가 엎어진 경우도, 예상했던 것과 달라서 쓸 내용이 없었던 적도 많다. 아니 대부분 그랬던 것 같다. 철저히 회사의 관점에서 보자면 드라마 취재는 돈만 들고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기획PD였기에, 이렇게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 들을 수 있어 다행이었던 것은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마주칠 일 없을 사람들을 만나 내가 몰랐던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일. 이렇게 사는 삶도 있구나. 깨닫게 되는 일. 내가 살면서 겪은 일이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인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구나. 그 정도에 넘어지지 않고 저 정도까지 할 수도 있구나를 배우는 일.

모두 내가 드라마 취재를 하면서 느꼈던 것들이고, 이것이 내가 취재를 기획PD를 하면서 가장 재밌었던 일이라고 말하는 이유다.




>> 취재에 응해주신 분들, 저는 지금도 늘 응원하고 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PPL이 대체 뭐길래 나를 울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