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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Apr 09. 2019

내가 니 시다바리가?

드라마 기획PD의 또 다른 이름 


드라마 기획PD라는 직업은 나에겐 애증 그 자체였다. 일에 대한 프라이드가 미친 듯이 솟구쳤다가도 이 일을 선택한 과거의 나를 쫓아가서 한대 치고 싶을 정도로 짜증 나기도 했다. 마치 헤어지고 싶은데 헤어질 수 없는 구질구질한 연인 같다고나 할까. 그 직업의 특성인 것 같다. 극단적인 양면성을 지녔다. 






드라마 크리에이터로서의 기획PD


지금도 기획을 하고 있지만 무에서 유를 만든다는 건 고통 속에 짜릿함이 있는 일이다. 웹툰, 영화 등을 보면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 일부터- 우리가 원하는 톤에 맞는 글을 쓰는 작가를 찾는 일, 함께 회의를 하면서 대본을 다듬어 가는 일... 한 편의 드라마를 탄생시키기 위한 과정은 그야말로 creative의 총집합 같은 느낌이다.


기획PD를 하면서 초기 기획단계부터 봐온 대본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중에 실제로 온에어 되는 걸 본 드라마는 몇 편 되지 않을 정도로 그 과정은 길고 지난하기 짝이 없다. 그 고단한 길을 작가와 함께 걷는 사람이 기획PD이다.  드라마의 방향을 함께 잡고, 편성까지 몇십 번 반복하는 대본 수정에 필요한 회의를 늘 함께 하는 사람,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기꺼이 온갖 방법으로 찾아주는 사람, 나아가 인물의 대사 한 줄도 함께 고민하는 사람이 기획PD이다. 


물론 대본을 철저히 작가 본인의 머리와 손으로만 내보내는 작가도 있을 수 있을 거다. (개인적으론 본 적 없다.) 그렇지만 나는 드라마 대본이 오롯이 작가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빚어내는 합작품이다. 어디 흠이라도 날까 조심스러운 손길로 하나하나 정성스레 빚어낸... 보통 드라마의 스포트라이트는 감독, 작가, 배우에게만 돌아가지만 나는 안다. 그 뒤편에는 기획PD도 있다는 걸- 


늘 가려진 사람이지만 그래도 크리에이터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스스로는 알고 있으니까!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저는 드라마 만들어요.라는 소릴 먼저 할 정도로 그 일을 좋아했다. 





시다바리로서의 기획 PD 


(일본어를 사용하고 싶지는 않으나 이를 대체할만한 단어가 없어 사용합니다.)

반면, 나는 기획PD 시절 작가들의 시다바리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자존심이 상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지만 지금에 와서 솔직히 인정한다.

젠장, 저 말이 딱이다! 



시다바리의 서막

오래된 기억이긴 한데 아마 입사하고 일주일 정도 됐을 때였을 거다. 계약을 정리하면서 작가가 작업실로 쓰고 있던 성수동 오피스텔을 비우게 되었다.  그날이 토요일이었는데 팀장에게 오전에 잠깐 성수동으로 나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특이사항은 준비물이었다. 마른걸레.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일단 오라고 하니 갔고 그곳에서 입사 일주일 만에 '여긴 어디. 나는 누구?'라는 원초적인 질문을 맞닥뜨렸다. 이미 이사를 나가 오피스텔은 싹 비워져 있었는데, 바닥엔 먼지가 덩어리를 이룬 채 굴러다니고 있었고 화장실 문을 열자 신세계가 펼쳐졌다. 


세상에! 작업실을 일 년이나 쓰면서 화장실 청소는 한 번도 안 했던 게 분명했다. 변기가 누런 수준을 넘어선 원래 색이 이랬던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짙은 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래언니 표정=내 표정 (출처: MBC 나혼자 산다)


충격과 공포를 뒤로 하고 팀장과 나는 그 오피스텔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작은 원룸이었고 이사 청소 부르면 십만 원대로 끝났을 거다. 회사에 요청했으면 그 정도 금액 지원해주는 게 어렵진 않았을 텐데, 내 생각엔 팀장이 돈 아깝다며 본인이 한다고 나선 게 분명했다. 덕분에 나까지 황금 같은 주말에 아침부터 소환되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광이 나도록 걸레질을 해댔다. 집에서 방 청소도 안 하던 내가, 당시 얼굴도 본 적 없는 작가가 생활한 작업실을 왜 청소해야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러나 그 더러운 화장실 안에서 너무도 열심히 솔질하는 팀장 앞에선 끽소리도 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좁은 공간이라 청소가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집에 돌아오는 길, 어쩐지 앞으로의 생활이 고달프겠다는 예감이 들었고 역시나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사실 이 성수동 청소에 대한 기억은 처음 맞닥뜨린 일이었기 때문에 임팩트가 컸던 것뿐이다. 그 후로 이렇게 더러운 작업실은 없었지만 작업실 청소에 동원되는 일은 잦았다. 기획PD의 필수 업무 스킬에는 청소능력도 포함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기획PD 앤 보조작가

보조작가에게 임금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면서 회사는 그것도 내어주기가 아까웠던 것 같다. 오랫동안 표류하던 드라마의 편성이 드디어 확정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회사에선 보조작가를 구하지 않았다. 작가가 셋이나 되는데 보조작가가 왜 필요하냐는 논리에서였다. 사실 작가가 셋이니까 더욱 필요한 게 맞는데 말이다! 회사에선 여지없이 그 흙탕물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나는 늘 작업실에 상주해있어야 했다. 보통 보조작가가 옆에 붙어 작가들의 손발이 되어주는데, 그럴 사람이 없으니 내가 필요했던 거다. 고로 기획PD로의 업무도 해야 했고 보조작가의 업무까지 떠맡게 되었다. 이전 글에서 줄곧 얘기했지만 기획PD는 기획업무만 하는 것이 아니다. 대본 관련된 대부분의 업무들이 기획 PD 몫이기 때문에 챙겨야 할 게 많다. 내부에서 작가들과의 대본회의뿐 아니라 외부에서 촬영 중인 연출부와의 조율도 필요하고... 이러한 일들을 보조작가 없이 혼자 해야 했기 때문에 힘에 부치긴 했지만, 이런 건 당연히 기획PD의 업무라 생각해서 참을 수 있었다. 정말 사람을 지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식사 앤 커피 셔틀  

작가들의 식사와 간식, 커피 등을 챙기는 것도 내 몫이었다. 작업실에서 작가들이 각자 방에서 작업을 하고 있으면 나는 거실 책상에서 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시간 되면 청소도 좀 하고...(그놈의 청소) 그러다가 배가 좀 고픈 듯싶으면 어떻게 식사를 챙겨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한다. 마치 작가들의 식사를 챙기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같아서 유쾌한 고민은 아니었다. 게다가 방송 초반에야 밖에 나가서 사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있지만 중반부터는 정말 생방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나가서 먹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지금처럼 배달어플이 있었던 것도 아니어서 대부분 내가 나가, 직접 음식을 사 와야 했다. 말 그대로 나는 식사와 커피셔틀이 되었다.


내 몫까지 총 4인분의 식사를 포장하면 두 손으로 들기에도 벅찼다. 그래서 식사를 먼저 사 오고 커피는 따로 사러 가는 게 맞았는데, 하루는 이게 너무 싫은 거다. 식사 후엔 모두들 커피를 찾기 마련인데... 그럼 나는 식사를 급히 하고 또 커피를 사러 가야 하니 좋을 리가 있겠는가.  무리해서라도 식사와 커피를 한 번에 사가기로 했다. 머리로는 당연히 안 되는 걸 알았지만, 당시에 생활 사이클이 다 무너져서 정신이 좀 빠져 있었던 것 같다. 고집스레 양손에 식사 4인분과 커피 4잔을 챙겨 들고는 몇 걸음 가지도 못한 채 커피를 쏟고 말았다.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이른 저녁시간, 여의도를 빠져나가려는 직장인들이 얼마나 많던지.  나를 흘깃거리며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발 밑에 흐르는 아메리카노를 보며 엉엉 울어버렸다. 창피함 이런 것도 아니었고 그냥 화가 나서 울었다. 평소에 욕을 하는 스타일도 아닌데 저절로 쌍욕이 나왔다. 이게 다 드라마를 위해서다.라는 마인드는 아무것도 모르던 1년 차 때나 가능했다. 3년 차였던 나에게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나. 내가 이런 셔틀이나 하려고 이 일을 한다 했나. 남들 퇴근하는 시간에 집에갈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이렇게 일해서 쥐꼬리만큼의 월급을 받아가는 내가 한심했다. 그만큼 이 일이 징글징글하게 느껴졌다.






"PD님은 왜 이 일을 안 그만둬요?"

대본을 송고하고 오랜만에 함께 커피를 마시는데, 작가님 한분이 나에게 진지하게 물어오셨다. 

너무 신선한 질문이었다. 왜 그만두지 않냐니. 이것 참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 일이 적성에 안 맞아 보이는데 왜 안 그만두냐고 하는 걸까. 아니면 작업실에서 수발드는 내가 애처로운 걸까. 아마도 후자였을 거다. (나를 많이 배려해주시던 작가님이다.) 한창 온에어 중이던 바쁜 시기였고 사실 기획PD로서 가장 뿌듯하고 행복한 시기어야 했지만 나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으니까. 스스로가 시다바리처럼 느껴졌는데 행복할 리가 없지. 연륜 있는 작가님 눈에 그게 보이지 않을 리 없고. 


작가님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멋쩍게 웃고 말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그러게... 나 왜 이 일을 그만두지 않는 걸까. 그렇다면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 게.







>>> 그 후로 몇 년이 흐른 지금에야 알게 된 거지만. 다른 제작사에서는 드라마가 방영이 되면 기획PD에게 일정의 수고비가 나온다고 한다. 당연하다. 수고비라도 없으면 어떤 기획PD가 드라마 방영을 달가워하겠는가. 저렇게 고생길이 훤한데! 

물론 나는 수고비는커녕 제대로 된 휴가도 받지 못했다.




드라마 기획PD 잔혹사는 안개의 8년 전, 첫 직장생활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제 경험에 따른 것이기에 몹시 주관적이며, 일반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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