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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May 10. 2019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 쉐도우 작가

드라마의 이유있는 안드로메다행


당신이 만약 드라마 판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쉐도우 작가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다면, 먼저 축하를 건네야 할 것 같다. 모쪼록 다행인 환경에서 일하고 있다는 거니까. 모를수록 좋은 것들이 있는데, 저 단어가 딱 그렇다. 나 역시 모르고 싶었는데 불행하게도 기획 PD 3년 차에 저 단어를 알게 되었고 할 술 더 떠, 우리 드라마에도 '그'가 등장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생소한 단어일 거라고 생각한다.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는 아니니까. 쉐도우 작가라니?

그는 말 그대로 그림자로 존재한다. 이름도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누군가의 뒤에 존재한다. 볼드모트도 아닌데... 이름을 모르니까 이름을 말할 수도 없다.  당연히 공식적으로 대본을 쓰는 작가의 뒤는 아니다.  대부분 감독(혹은 방송국) 뒤에 존재하게 된다. 어떤 작가가 자신의 대본에 갑자기 끼어들어 수정하는 작가를 반길까? 그게 바로 쉐도우 작가가 하는 일이다. 집필 중인 작가의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감독은 추가적으로 작가를 붙여서 원하는 방향으로 수정하게 하는데 그 작가를 우리는 쉐도우 작가라 부른다. 어느 작가나 자신의 작품을 하고 싶어 하지 뒤에서 남의 대본을 고치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진 않는다. 그런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건 그 역시 힘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은 씁쓸한 이름, 쉐도우 작가



담당했던 드라마가 중반부를 넘어가고 있었을 때였다. (여러번 언급했지만) 우리 드라마는 시청률이 밑바닥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여로모로 방송국의 압박을 받고 있었다. 16부작이었는데 14부로 끝내네 마네 말이 나오기 시작했고 작업실에는 담당 PD를 넘어서서 CP가 방문하기 시작했다. CP는 방송국의 총괄 프로듀서(Chief Producer)로 쉽게 말해 PD들의 대빵이다. 나같이 제작사의 일개 기획 PD가 만날 일이 거의 없는 사람이란 말이다. 실제로 내가 직접 대면할 일이 없었고 끝날 때까지 그럴 줄 알았건만... 안습의 시청률이 CP님을 작업실로 인도하고 말았다. 그 정도로 나름의 대위기 상황이었다.



그리고 상황이 그쯤 되니 방송국에서 드라마의 방향성이라든지 캐릭터는 아웃 오브 안중이 되어갔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같으니 이왕 죽을 거라면 시청률을 조금이라도 올리고 죽자 싶었던 것 같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자극적인 대사, 에피소드를 만들기를 원했다. 방송국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경쟁작들이 워낙 셌고 옆 채널에서는 주인공이 걸핏하면 사람을 죽여댔는데 우리 드라마는 세상 착한 인물밖에 없는 거다. 악역이라고 있어봤자 눈에서 레이저 내뿜고 따귀 때리는 정도였으니. 그러나 변명을 좀 해보자면, 드라마에는 각각의 톤이라는 게 있다. 우리가 타고난 성격을 쉽게 바꾸지 못하는 것과 같다. 우리 드라마는 태생이 착하고 밋밋하다. 왜 그런 애들 중에서도 통통 튀는 매력이 있고 가끔 뻘하게 웃기는 애들이 있지 않은가. 그랬다면 성공적이었겠지만 그러지 못해서 망했다. 우리 아이는 존재감 없이 묻혀 있을 때 제일 행복한 그런 아이였다. 애석하게도 말이지. 흑흑



부모가 그걸 좀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면 좋겠지만 그 바닥은 그렇게 너그러운 곳이 못 된다. 바로 목덜미를 잡아채서 벼랑 끝으로 몰아간다. 너 우리 돈 벌어다주지 못할 거면 그냥 죽어. 필요 없으니까. 뭐 이런 식. 애초에 도덕적으로 이리 보고 저리 봐가며 상대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그래서 쉐도우 작가라는 요망한 이름이 탄생한 걸지도 모른다.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판단으로는 있을 수 없는 개념이지 않은가.



여하튼 우리 아이의 착한 성격과 밋밋한 말들을 보다 못한 감독이 결단을 내렸다.

물론! 작업실에 있는 우리에게는 사전에 한마디의 언급이라든지 상의도 없었다. 작가와 제작사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마도 감독은 아는 작가를 컨택했을 거고 본인이 원하는 바대로 대본을 수정하도록 한 거다.

그리고 결국, 우리 눈 앞에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대본이 등장하고 말았다.






몹시 당황스러운 이 시추에이션은 이미 벌어졌고 당연히 작가님들은 영문 모를 대본을 보며 상황 파악이 되는대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대로는 진행할 수 없다며 생방중인 드라마에 파업 선언을 해버린 거다. 나같은 뽀시래기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고 늦은 밤 긴급회의가 열렸다.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윗 분들께서 모여 회의를 했고 나는 빠져 있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들이 오고 갔는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확실한 건 이 과정에서 여러 사람의 마음에 큰 상처가 났다는 거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말들이 오고 갔고, 자신들의 손해를 내세우기에 급급했을 거다. 한 마음으로 똘똘 뭉쳐 완주해도 모자랄 판에 서로 간의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알았다. 쉐도우 작가가 등장한다는 것이 그저 새로운 대본의 등장을 알리는 게 아니라는 것을. 팀(Team)을 산산조각 내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제작사 입장에서도 쉐도우 작가의 존재는 달가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쉐도우 작가가 쓴 대본이 죽어가는 드라마를 심폐 소생할 수 있다면? 다행일 수도 있다. 어쨌든 드라마가 잘 돼야 모두가 잘 되는 일이니까. 그러나 상식적으로 급박한 상황에서 투입된 쉐도우 작가가 좋은 대본을 뽑는다는 게 가능할까? 몇 년을 준비하고 쓰는 작가들은 머릿속에 이미 하나의 세계관이 형성되어 있다.  나름의 세계관 속에서 탄생하는 대본과 그런 이해 없이 지금까지의 흐름으로 짜 맞춰내는 대본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기에 당연히 쉐도우 작가의 대본은 퀄리티가 떨어졌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판단하려고 해도 이건 우리 드라마에 대한 이해 없이 급하게 감독의 말만 듣고 써 내려간 대본이었다. 이 인물이 이런 대사를 할리가 없는데? 이 상황에서 이런 행동은 안 할 텐데... 하나하나가 삐끗거렸다. 그러나 갑은 방송국. 우리는 슈퍼 을을을. 방송국의 니즈를 넣은 대본이니 어쩌다 좋은 부분이 나오면 그걸 다시 수정해서 원래 대본에 맞게 녹여내야 했다. 역시나 중간에 낀 기획 PD는 일이 하나 더 늘었으니 미치겠는 상황인 거고.



그렇게 까지 했는데 드라마가 좀 달라졌냐고 묻고 싶을 거다. 결론은 아니다. 더 안 좋아졌으면 안 좋아졌지... 심지어 후반부에는 고칠 새도 없어서 쉐도우 작가의 존재는 점점 희미해져버리고 말았다. 결국 드라마는 끝까지 그저 그런 시청률과 낮은 화제성으로 막을 내렸고, (아마 본인도 고통스러웠겠지만) 모두에게 아픔만 남기고 정작 그는 공식적으로 남긴 흔적 하나 없이 지워졌다.






내가 운이 나빠서 우리 드라마에만 쉐도우 작가가 붙었던 건 아니다. 이게 엄청나게 특별한 일은 아니란 거다. 그리고 그가 등장하는 것이 꼭 시청률이 낮을 때만도 아니다. 실제로 회사에서 진행했던 다음 드라마 때도 쉐도우 작가가 등장하고 말았는데, 심지어 그 드라마는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등장했고 역시나 한 회차의 대본이 두 개인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벌어졌다. 처음부터 대본을 집필한 작가는 충격으로 응급실까지 실려갔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 어휴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보던 드라마의 내용이 갑자기 안드로메다로 가는 걸 보면 마음이 아프다. 물론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으나, 대체로 드라마 안에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수히 많은 변수가 벌어진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작가가 갑자기 미친 거 아니야?라고 생각되기보다는 저 안에서는 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싶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또 마음을 다치고 있을까.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괜스레 측은하다. 시청자들에게 즐거움을 주자고 만드는 드라만데, 만드는 과정은 왜 이리도 살벌해야 하는 걸까.



정말이지 다시 한번 느낀다.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하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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