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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 Jun 21. 2019

표절은 안돼도 우라까이는 된다

부디 관대해지지 말아요.

최근 드라마판이 시끌시끌했다. 흥행 보증 감독, 작가와 초호화 캐스팅으로 무장한 무려 500억 대작이 모습을 드러냈고 오랜만에 드라마에 모습을 드러낸 배우들의 복귀작들도 속속 방영을 시작했다. 개인적으로도 너무 기다렸던 드라마들이 많아 행복한 요즘. 아마도 드라마 업계 사람들은 만나면 할 얘기가 참 많아 좋지 않을까. 애써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지 않아도 된다는 건 특히, 햇병아리 실무자들의 입장에서는 축복받은 시즌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야깃거리가 많은 만큼,  알고 싶지 않아도 귀에 자꾸 박혀오는 단어가 하나 있었다. 



표절

사실 어느 분야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면서 쉬쉬하게 되는 단어이다. 진짜라면 문제고 설사 진짜가 아니더라도 언급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명예스럽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드라마가 인기를 좀 끌면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단어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점점 사람들의 반응도 무뎌지고 있지만, 사실 무뎌져서는 안 되는 단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요.  우리의 가오는 소중하니까요. (출처: 영화 '베테랑' )


기획자로 일하면서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려야 하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분명 그것은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기획자의 가오이고 사명인 거다. 그런데 드라마 기획 PD 일을 시작하면서 그런 나의 사명을 헷갈리게 만든 단어가 있었다.



우라까이

나는 이 단어를 드라마판에 들어와서야 처음 접했다. 대본회의를 하는데 대표님이 계속 "그거랑 잘 우라까이 해서~" "거 있잖아. 우라까이 해서 좀 만들어봐."라는 말씀을 하셨고, 나는 저 말은 대체 무슨 말인가. 도대체 의미가 유추조차 되지 않는 희한한 단어라는 생각을 하며 멀뚱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신문·방송 현장 일본말 속어. 신문에서 기사 마감에 임박해 다른 신문사의 기사(특종 포함) 일부를 대충 바꾸거나 조합해 새로운 자기 기사처럼 내는 행위를 '우라까이 한다'라고 말한다. 방송에서는 적당히 외형만 바꿔서 자기 것처럼 만들어 방송하는 것, 혹은 일부를 그렇게 하는 것을 말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우라까이 (영상 콘텐츠 제작 사전, 2014. 9. 17., 이영돈)


조금 애매한 느낌이지 않은지.  단어는 다르지만 사실 표절과 크게 다른 의미는 아니다. 뭐. 정확히 말하면 표절을 비껴가는 수준에서의 베끼기? 짜집기 정도라고 할까. 어쩌면 표절보다 더 교묘하고 치사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관행이라는 말 아래, 드라마판에서는 너무나 쉽게 그 말을 내뱉었고 또 빈번하게 우라까이 하고 있었다.






특히, 드라마판에 표절 의혹이 난무하는 이유를 내가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저 단어가 기여하는 바 있으리라 짐작해본다. 내가 느꼈던 우라까이의 힘은 작가 혹은 제작자에게 철저한 방어막이 되어준다는 것이다. 다른 작품의 좋은 설정을 빼오면서도 그것은 그저 우라까이일 뿐이지 베끼는 것이 아니라는 자기 합리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제작자들은 점점 다른 작품을 베끼는 행위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않고 관대해진다.


조금이라도 두려워합시다 우리 (출처 : pixabay)


한술 더 떠, 이런 상황에 더욱 힘을 실어주는 것은 바로 법적인 표절 판결의 엄격함이다.

엄격? 엄격하면 더 좋은 거 아닌가? 그게 엄격하긴 한데... 표절에 엄격한 것이 아니라 표절 판결에 엄격한 것이다.


그간 많은 표절시비가 있었고 재판도 있었지만, 대부분 원고의 청구가 기각되거나 패소했다. 오히려 표절 의혹을 받은 작가들이 명예훼손으로 원고 측에 소송을 걸기도 하니... 표절이 의심되더라도 재판까지 가는 것은 어려운 싸움이라는 걸 이제는 모두가 알고 있다. 이는 설사 두 작품의 설정이 매우 유사하고 내용 전개까지 똑같이 흘러가더라도  아이디어 영역으로 포함되어 저작물 보호를 받지 못함 때문이다. 아이디어 영역에 포함되는 것은 저작재산권의 보호대상이 되지 못하고, 그러므로 대사가 똑같지 않고서야 표절 판결을 받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 그놈의 우라까이는 더욱 당당하게 자행되고 있다. 표절이 아닌 우라까이라는 이름으로, 다들 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그 속에서 원작자들은 본인들의 오리지널이 누군가의 창작물로 둔갑하는 걸 지켜보며 고통받는다. 오랜 산고 끝에 낳은 아이를 다른 이가 엄마라고 우기는 상황이라고 할까. 억울해서 내가 이 아이의 엄마라고 말하면 병원에서는 "이 아이의 엄마는 당신일 수 있지만 이 사람인 것도 가능하다."는 복장 터지는 소리를 하는 거다. 






사실 이 글은 애초에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글이 아니다. 이 매거진은 기본적으로 내가 드라마 제작사를 다니면서 겪었던 잔혹사를 일기처럼 쓰고자 했던 것이기에, 그간의 매거진 성격과도 조금 다른 글이다. 그러나 내가 드라마판에 있었던 수년 전과 지금, 아직도 우라까이 관행에 너그러운 제작사와 표절 의혹에도 시청률만 잘 나오면 되는 관대한 방송사, 또 그것들을 '재밌으면 됐지.'라는 마음으로 소비하는 시청자들까지... 달라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쓰게 된 글이다. 



드라마건 뭐건 창작을 하는 사람들은 좀 더 자신의 창작물만큼 타인의 창작물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 물론 언제나 새로운 것을 떠올리기는 힘들다. 그럴 수도 없고... 이미 나온 것들에 나의 아이디어를 가미해 더 좋은 것을 뽑아내고 또 누군가는 이것을 더 업그레이드시키고, 이런 과정을 통해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도 맞다. 그러나 이 과정에 본인의 고민이 꼭 필요하다. 타인의 것이 아닌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고민과 그것의 결과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기선 그게 배려인 것 같다. 고민 없이 그대로 가져다 쓰는 것은 표절이기 이전에, 창작자로서 너무 모양 빠지지 않는가. 

체면 떨어지는 짓은 하지 말아요. 우리.




>> 작품 제목도 서슴없이 쓰면서 구체적으로 쓰고 싶었는데, 어쨌든 표절 의혹이지 표절은 아닌지라. 

속시원히 쓸 수가 없어 글이 좀 답답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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