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Critique of Ethics – A. J. Ayer
A Critique of Ethics – A. J. Ayer
: 에이어에 대한 견해
에이어의 ‘A Critique of Ethics’는 윤리적 진술에 대한 판단, 다시 말해 도덕판단에 대한 글이다. 에이어는 윤리학의 일반적인 체계를 네 가지로 나눈다. 1) 첫째는 윤리적 용어의 정의나 특정 정의의 정당성 또는 가능성에 대한 판단을 표현하는 명제. 둘째, 도덕적 경험의 현상과 그 원인을 설명하는 명제. 셋째, 도덕적 미덕에 대한 권고. 마지막으로는 실제 윤리적 판단이다. 하지만 에이어의 범주가 정당하냐 아니냐를 떠나서 윤리를 설명하고자 할 때 우리가 처음부터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윤리는 지식인가? 다시 말해 도덕이란 지식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는 에이어가 도덕 판단을 명제가 아님을 증명하려는 시도와도 결부된 질문일 것이다.
에이어는 윤리적 판단의 표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we may say decisively that they do not belong to ethical philosophy. A strictly philosophical treatise on ethics should therefore make no ethical pronouncements. But it should, by giving an analysis of ethical terms, show what is the category to which all such pronouncements belong. And this is what we are now about to do.”
이는 윤리적 발언이란 학문의 영역, 철학의 영역이 아니라는 뜻이다. 윤리 철학자들이 수행해야 할 과제는 윤리 용어에 대한 과제다. 우리가 어떤 걸 느끼느냐의 범주는 철학이 아니라 사회학이나 심리학의 몫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철학은 에이어의 말대로 논리 추론이나 용어 정의를 수행하는 작업인가?
들뢰즈에 따르면 철학은 어떤 새로운 문제에 새로운 형태의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일종의 철학은 창조적 행위이며 언어나 기호에 매몰되는 것이 아닌(들뢰즈가 계속해서 새로운 용어를 만들고, 하이데거가 언어로 존재를 해명하려고 했다는 점을 눈여겨보자)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윤리 또한 마찬가지의 범주에 속한다고도 볼 수 있다. 언뜻 분석철학자들의 의도대로, 윤리는 '무엇을 규명하고 해명하는가'의 영역에 한정해서는 필시 분석철학의 역할에 일임할 수 있다. 하지만 에이어는 기호의 저편에서 함의된 신성함을 잊고 있다. 이는 단순한 호오(好惡)의 감정의 영역이 아닌 도덕 감정의 영역이다. 에이어는 이 둘을 구분할 수 없지만 도덕은 필시 도덕 감정이라는, 퇴계의 사단과 같은 감정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단순히 어떤 감정의 표현을 얼굴이라는 계기판으로 드러내며 사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는 삶에 대한 존경심을 가질 수 있고 선에 대한 존경심을 가질 수 있다. 존경심이라는 감정을 단순히 감정표현의 술어만으로 규정할 수 있는가? 도덕이란 한 줄로 정리되는 기호에 불과한가? 에이어가 말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행동 기제는 형이상학적 개념의 이해가 아니라 실제로는 감정이 그 원인이라는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그의 주장대로 형이상학적 내용은 현실에서 경험적으로 검증 불가능하다. 하지만 경험적으로 검증 불가능하다고 해서 그것이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실제로 동족 살해범이라 밝혀진다(경험적 검증 사실) 해도 우리는 여전히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다(가치). 2) 이는 경험적 추론으로 나올 수 있는 결론인가? 아니면 경험적으로 검증하지 못하는 결과인가? 도덕적 행위의 원인을 과학으로 판단한다는 시도 또한 도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견해다. 도덕은 생물학적으로도, 물리적으로도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선은 구성되는 것이며 내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이는 설령 내재되어 있지 않다고 밝혀진다 한들 계속해서 선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의도다). 과학자들은 선을 밝히기 위해 우리 안의 생명 시스템을 분석하는 데 열중하겠지만 도덕학자들은 그러한 일에 몰두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도덕이란 생명 시스템이라는 경험적 차원, 현상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뇌의 전기신호로 우리가 감정을 느끼고 우리가 움직인다는 설명이 과연 도덕철학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인과론적으로 살아있는 유기체라는 설명은 우리의 행동들을 전반적으로 밝혀주지 못한다. 도킨스가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 이론을 내세웠지만 정작 자신이 그 유전자대로 책을 쓰고 행동을 했다는 것을 온전히 해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굳이 책이라는 수단을 쓰지 않고도 지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을 텐데 왜 하필이면 책이란 말인가? 도덕 철학은 이와 비슷한 세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뇌의 신호로 인한 감정인데 왜 하필 이 감정이 도덕 감정이라 할 수 있는가? 퇴계는 이러한 맥락에서 사단과 칠정을 엄격하게 구분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도덕 감정을 일반 감정의 기호로 전락시키는 순간, 우리는 도덕적 행동에 아무런 의미도 느끼지 못하고 도덕적 행동을 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엄밀히 말하면 도덕과 다른 사사로운 감정의 구분이 없어지면 결국 우리는 도덕을 인식하지 못하고 도덕에 대한 믿음을 잃게 된다). 여기서 에이어는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사회학이나 심리학의 일이지 철학이 하는 일이 결코 아니라고. 하지만 에이어의 식이라면 도덕을 철학이라 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학술적 분석이 되지 않는다고 가치가 없는 것도 아니고 에이어 또한 이 부분에선 동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도덕 판단이 단순히 감정 표현에 불과하다는 것은 에이어가 감정과 우리 사회의 존경심이라는 성스러움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에이어는 어떤 행위가 옳다는 것은 특정 집단에 의해 일반적 승인이 곧 옳은 것은 아니라고 한다. 전적으로 이 말에는 동의하지만 그 배경은 나와는 다르다. 도덕은 다수가 옳다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이어는
“But, in all such cases, we find, if we consider the matter closely, that the dispute is not really about a question of value, but about a question of fact.”
즉 도덕적 가치에 대한 논쟁은 사실관계에 대한 논쟁이라 답한다. 진정한 가치 논쟁이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윤리적 진술이란 명제가 될 수가 없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이 이는 도덕의 정체를 잘못 파악한 경우다. 오로지 사실관계에 대한 추론만이 진정한 앎이라면 도덕은 그러한 류의 앎일 필요는 전혀 없다. 애초에 도덕은 에이어가 밝히려는 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에이어는 도덕의 정체를 파악했다고 볼 수 있지만 도덕이 그곳에 들어 있지 않다고 해서 학술적이나 의미론적으로 가치가 없다고 단언하는 것은 오판이다.
에이어의 마지막 주장 3) 중 도덕의 메커니즘을 단순히 사회적 합의 감정, 특정 유형의 행동이 창출할 사회적 이득의 차원으로 묘사하고 그저 그러한 억제들이 힘을 발휘하는 것이라 설명한 부분은 도덕의 요지를 명확하게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에이어는 이들의 본질적인 결함을 윤리적 감정의 원인과 속성을 언급하는 명제를 마치 윤리적 개념으로 정의한다는 것인데, 윤리적 개념이 의사 개념(pseudo-concepts)이며 그것은 정의될 수 없다고 한다. 물론 문장으로, 분석적으로 윤리는 정의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어는 도덕의 이면을 놓치고 있다는 인상을 나는 여전히 지울 수 없다. 무엇이 사실이어야만 하고 어떤 것이 증명 가능해야 한다는 전제는 도덕에서는 별로 소용이 없는 일이다. 우리의 측은함이 단순히 사회적 감정 표현 아래에 있기 때문에 강력한 힘을 갖는 것일까. 우리 사회 자체가 오염된 사회라면? 아니면 혐오의 사회라면? 그것도 도덕의 표현이라 할 수 있을까?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라 묶어버릴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불의를 막을 수 있을 것이며 또 도덕을 할 수 있을 것인가?
1) There are, first of all, propositions which express definitions of ethical terms, or judgments about the legitimacy or possibility of certain definitions. Secondly, there are propositions describing the phenomena of moral experience, and their causes. Thirdly, there are exhortations to moral virtue. And, lastly, there are actual ethical judgments. It is unfortunately the case that the distinction between these four classes, plain as it is, is commonly ignored by ethical philosophers; with the result that it is often very difficult to tell from their works what it is that they are seeking to discover or prove.
2) 칸트의 『윤리형이상학 정초』는 이러한 기획 의도를 지니고 있다. 『정초』는 애당초 우리에게 정언명법이라는 가혹한 의무를 시행하라는 강요가 아니라, 아무리 천한 출신이라도, 내 인성이 그리 훌륭하지 않더라도 의무로부터 나온 행위를 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증명이다. 『정초』에 대한 자세한 글은 다음으로 미루자.
3) When one comes to pursue the psychological enquiries which constitute ethical science, one is immediately enabled to account for the Kantian and hedonistic theories of morals. For one finds that one of the chief causes of moral behavior is fear, both conscious and unconscious, of a god ’ s displeasure, and fear of the enmity of society. And this, indeed, is the reason why moral precepts present themselves to some people as “categorical” commands. And one finds, also, that the moral code of a society is partly determined by the beliefs of that society concerning the conditions of its own happiness – or, in other words, that a society tends to encourage or discourage a given type of conduct by the use of moral sanctions according as it appears to promote or detract from the contentment of the society as a whole. And this is the reason why altruism is recommended in most moral codes and egotism condemned. It is from the observation of this connection between morality and happiness that hedonistic or eudæmonistic theories of morals ultimately spring, just as the moral theory of Kant is based on the fact, previously explained, that moral precepts have for some people the force of inexorable commands. As each of these theories ignores the fact which lies at the root of the other, both may be criticized as being one-sided; but this is not the main objection to either of them. Their essential defect is that they treat propositions which refer to the causes and attributes of our ethical feelings as if they were definitions of ethical concepts. And thus they fail to recognize that ethical concepts are pseudo-concepts and consequently indefinab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