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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지 Feb 26. 2021

암경험자이지만, 일을 시작합니다.

아기엄마의 투병일기

긴 항암치료를 마치고 몸을 회복하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금이다.
이제는 암환우가 아닌 암경험자로 불리는 사람이 되었다.


친정엄마는 앞으로 무리하지 말고 쉬며 평생을 살라하시지만, 그렇게 살 수만은 없다.
또래들은 내가 아프다고 멈춰있는 사이 저만치 앞으로 나아갔고, 내가 멈춰있던 사이 홀로 가족 앞에 서서 생계를 이어 온 남편에게 도움도 되고 싶고, 무엇보다 나는 평생 꽃처럼 집안에 앉아 자수나 놓고 살 성미가 못 되는 사람임을 내가 잘 알기에, 일을 할 기회가 왔을 때 덥석 잡아버렸다.


지난주부터 부산을 옆집 드나들 듯 오가고 있다.
새로 나온 명함을 들고 처음 보는 사람들을 만났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 시작할 수 있음에 가슴 벅차게 흥분도 됐고, 나 스스로를 세상에 무용한 잉여인간이라 여겼던 낮은 자존감을 딛고 일어설 계기가 된 것 같아 묘한 쾌감도 느꼈다. 무엇보다 다시 내가 하던 '일'을 시작할 수 있다는 그 기쁨과 희열이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2년전, 접니다.


단체 일과 관련해 만나는 사람마다 내게 물었다.
이 단체를 어떻게 알게 되어 이렇게 같이 왔느냐고.

아빠 돌아가시고, 표적항암 중이라 머리가 제법 복슬복슬 나기 시작하던 즈음이었다.
그날도 우울감에 밤잠을 이루지 못해 페이스북으로 환우 카페로 여기저리를 떠돌아다니다가, 환우 프로필 사진을 찍어준다는 페이지 글을 읽은 게 시작이었다. '분명 많이들 지원할 텐데, 되겠어?' 싶었지만, 일단 신청만 해봤다.

오랜만에 또각또각 구두를 신고 룰루랄라 걸어갔던 그날의 신촌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스튜디오에서 젊유애 대표를 처음 만났다.
부산에 산다고 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유방암에 걸렸고, 아직 치료 중이라고 했다. 자신이 입원해 있으며 이것저것 데이터와 논문들을 찾아보니 젊은 여성은 치료 후에 맞닥뜨려야 하는 문제가 많고 정책적으로 도움받을 장치들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을 찾았다고 했다. 그러니 단체를 만들어 개선해야 한다고 했던가.


나는 시민단체에서 일을 했다.
자신들의 삶에 필요하고, 공익에 부합한다 싶으면 끝내 관철시켜 세상을 변화시킨 선배들이 있는 곳이었다.
학생운동의 연장선에서, 아이를 낳고 키우며 마주하는 문제들을 하나씩 바꾸고 개선해 낸 386세대 아래에서 일을 배웠다. 원래 내가 원했던 삶은 정책을 연구해 논문이나 쓰는 것이었지만, 인생이란 늘 나를 내 의지 아닌 인생의 의지대로 어딘가에 데려다 놨으니까.
그마저도 아이를 낳으며 경력을 잃었다.
속상했지만, 당시엔 그게 최선이었다.

 
아이 두 돌 무렵 다시 일을 시작했다.
시민사회단체에 관련된 일은 아니었고, 정부 지원사업을 받아 인문학 프로그램을 기획하는 것이었다. 한 동네에서 또래 아이를 키우는, 고학력 경단맘이 같이 지원해보자며 연락을 주어 시작할 수 있었다.
보고 배운 게 그런 거라고, 나는 내 또래의 젊은 엄마들이 겪는 인생의 단절감을 소재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반응이 좋았다. 다음번에는 시간대를 좀 나눠서 많은 사람이 참여하게 해 달라는 요청도 많이 있었고, 강의 의뢰도 들어왔었다.

하지만 내게 다음은 없었다.
팀 사람들이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 나는 암수술을 받고 암환자의 삶을 살 준비를 해야 했다.


내 인생이라는 건 그냥 이렇게 가는 족족 주저앉으며 사는 건가 한없이 슬프고 무력하고 우울했다.
내가 할 수 있고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은 내 곁에서 배고프다며 배 앞에서 손을 동글동글 굴리는 저 아이뿐인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만 3세짜리 어린애와 같이 어떻게든 버텨 살아내는 것뿐이었다.
이참에 글을 써보자 싶었지만, 비주류의 주제를 다루는 내 글은 세상에 책으로 나오기에 부적합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누군가는 계속 글로 기록을 남겨야, 언젠가 무언가라도 변한다고 믿었으니까.
그 믿음 아래에 투병일기가 있었다.
어느 젊은 아이 엄마가 암투병을 하고, 어린아이를 키우며 겪는 일들을 세상에 글로 남기고 싶었다.
이런 사람이 있다고.
아니, 이런 사람들이 있다고.
아픈 엄마와 어린아이와 어깨가 무거운 가장이 비바람 치는 사각지대에 서있다고.
알리고 싶었다.

사람이 살아온 가닥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하던가.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는 알겠는데, 나는 할 능력이 없어서 그저 글만 쓰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생각했던 문제의식과 포인트를 정확히 풀어내는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사진 찍느라 정신없는 스튜디오에서 불쑥 그에게 말을 건넸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도울 수 있다고.
과연 내가 도울 수 있을지, 내 스스로도 의심이 들긴 했지만 일단 말은 그렇게 던졌다.
돕고 싶었고, 실제로 변화가 일어나면 좋겠다는 바람과 기대도 있었다.


그 후로 2년이 흘렀다.
2년 전, 우울의 끝을 달리던 시절, 분홍색 풍선을 들고 찍었던 내 얼굴은 지금도 단체 홈페이지 어딘가에 걸려있다. 그리고 2년이 흐른 지금, 새로운 사진을 다시 찍었다.

주제는 one team.

젊은 세대가 느닷없는 질병으로 인해 평생 주저앉지 않도록.
설령 부모가 아파도 아이를 큰 걱정 없이 키울 수 있도록.
같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며 암경험자 셋이 찍은 사진이었다.



단체의 창립총회가 있었다.

젊은 유방암환우의 애프터케어를 이야기하던 젊유애는 젊은 암 환우의 애프터케어와 일 치료 양립, 그리고 젊은암에 대한 인식 개선을 이야기하는 비영리 사단법인 “쉼표”가 되었다.

그리고 이날, 나는 세상 앞에 사단법인 쉼표의 수석연구원 박은혜로 처음 인사를 했다.


다들 나에게 어떻게 이 단체를 알게 되어 함께했느냐 묻는다. 질문에 답을 할 때마다 지난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과연 내가 쓸모 있는 인간일지 스스로를 의심하던 그 시절, 동네 친구와 언니들에게 도움받아 겨우겨우 견뎠던 그 시절, 도움만 받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모두에게 미안해하던 나에게 한 언니가 이런 말을 해줬다.

"괜찮아. 나도 예전에 받았던 거야. 은혜 씨는 지금 잘 받고 나중에 잘 돌려주면 돼."

그런 날이 온 것 같다.
내가 받은걸 돌려줄 시기 말이다.
어제도 주변에서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린 지인이 있다는 소식을 세 번이나 접했다.
젊은 세대의 암 발생률이 성별을 불문하고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더니, 정말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지난 정기검사에서, 늦은 밤 핵의학과 앞에서 봤던 단발머리 아기 엄마와 아이가 생각나는 건 왜일까. (통상 암수술을 앞두고 본스캔 등의 검사를 받습니다. 저희 병원에서는 핵의학과에서 합니다.)

내 뒤에 올 젊은 환우들은 나보다는 조금이라도 평탄한 길 걸어오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
역시 사람은 살던 대로 살아야 하는가 보다.

 
세상은 여전히 여러 곳에 선을 긋는다.
암을 경험한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암에 걸린 유리 같은 몸이니 평생 몸을 사리며 요양하며 살라고.
암에 걸려 경력이 단절되었으니 새로운 의미 있는 일을 찾아 살라고.
꽃처럼 인생을 음미하며 사는 것도 좋고, 사회적 가치를 따라 사는 것도 멋지다.
하지만 나는 내가 살던 대로, 내가 원했던 대로 살고 싶었다.

암에 걸렸었지만 일을 시작합니다.
암에 걸렸었어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암을 경험했어도 결혼할 수 있고.
암에 걸렸었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고.
이 모든 게 가능해야 젊은 세대가 마음 놓고 인생을 개척할 수 있습니다.
...
이렇게, 하얀 페이지에 깜박이는 까만 커서 위로 써 내려갈 글감이 하나 더 늘었다.



암 경험자이지만 일을 시작합니다.
암에 걸렸었지만, 나는 내가 원하고 좋아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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