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죽는 암이라 안 힘든게 아니고요
영화를 참 좋아했습니다.
10대와 20대엔 사뭇 진지한 내용들을 좋아해서 독립영화나 역사물을 즐겨 봤었죠. 코엑스 메가박스에서 조조부터 심야까지 연달아 영화만 보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쥬라기공원을 비롯해서 좀비물까지 하여간 무서운건 여전히 못보지만, 그래도 취향이라는게 달라지긴 했습니다.
네, 30대의 저는 재미있는 것들만 찾아서 봅니다.
영화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드라마를 주로 봅니다. 하지만 드라마건 영화건, 모두 재미가 있어야 합니다. 스토리 구성도 구성이지만, 무엇보다 말맛을 가장 최고로 칩니다. 그래서일까요. 제가 이병헌 감독의 작품들을 재미있어하는 이유 말이죠.
술꾼도시여자들은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토막영상으로 처음 접했습니다. 원작 웹툰이 있다던데, 웹툰을 어떻게 찾아서 보는지도 모르는 저는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어쩌다 보게 됐을 뿐인데, 와...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겠더군요.
결국 정주행을 했습니다.
간만에 보고 또 봐도 재미있는 드라마를 발견했네요. 티빙에서 TVN으로 옮겨오게 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될 것 같습니다.
술을 소재로 주변 눈치 보지 않고 만든 드라마.
처음엔 어이없는 반전 진행에 보게되고, 다음엔 예측불가 말맛에 보게되고, 그러다 생각보다 탄탄한 서사에 몰입해서 보게 되는.
네, 정말 오랜만에 뇌가 하~얘지도록 웃었습니다. 웃다가 웃었으니 엉덩이에 뿔이 나려나요.
웃는게 여러모로 좋다 하니, 좋겠죠.
그렇다고 제가 술도녀에서 한선화님이 열연중이신 지연이 캐릭터는 아니지 말입니다.
아, 문득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요.
이렇게 될거 그때 좀 더 저렇게 신나게 마시고 놀껄 그랬다고요.
술도녀 결말에 가까워지며 지연이 유방암에 걸리는 내용이 나오더군요.
결혼까지 생각한 그 남자는 이미 유방암으로 아내와 사별한 남자고요. 아이가 셋이라던가요.
소희의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스토리에서도 너무나 현실적이라 몰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유방암 진단에서 수술은 말 해 뭐하나요.
안타깝게도 댓글마다 술을 그렇게 마셔대서 암에 걸린거라던가, 유방암은 어차피 걸려도 잘 죽지 않고 사는 암인데 너무 설정이 엄살이지 않느냐는 등 지극히 일반적인 반응을 보며 사실 상처도 좀 받았습니다만, 그러니까 하고픈 말은 드라마가 너무나 현실적인데 비현실적이게 재미있더라고요.
술 많이 안 마셔도 걸리더군요. 유방암.
술을 안 마셔도 걸리고요.
모유수유 열심히 길게 해도 걸렸어요.
이렇게될거, 자유롭고 젊고 건강했던 그 시절에 나는 무슨 눈치와 관념을 따지느라 몸사리며 살았는지 이제야 후회가 듭니다. 좀 더 자유롭게 살 것을 그랬다며 말이지요.
저는 술을 대학원에 진학해서 배웠습니다.
술은 입에 대면 큰일이 나는 악마의 유혹이라고 생각했었지요. 네. 한때 네비게이토 자매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종교동아리는 근처에도 가지 않을 것 같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그랬던 제가 술을 입에 대기 시작한 이유는 마이웨이만 고집할 수 없었던 대학원의 문화와 어느순간 마주한 "신실한 선배님"이 민낯을 보게 된게 계기였죠. 아니 뭐 그렇다고 제가 말술이라는건 아닙니다.
그러고보니 그 즈음 남편을 만났고.
남편 따라서 포장마차에 처음 가봤고.
포장마차에서 파는 고갈비와 잔치국수를 처음 먹어봤네요. 그마저도 날이면 날마다 삼시세끼 챙겨 먹이고 재워야 하는 어린이가 있는 제 삶에서는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아내가 유방암 2기였거든요. 살 수 있는 확률이 70%라고 했는데 ... 정말 지연씨가 어떤 사람이건 다 상관이 없는데 그것만은..."
세명의 여주인공 중 한 명의 남자친구의 고백이었습니다.
정리하자면 아이가 셋인 젊은 부인이 유방암 2기 진단을 받았었고, 결국 암으로 사망을 했죠. 아내 사별 후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는 새로운 여자를 만났는데, 어쩌다보니 그녀 또한 유방암인 상황. 그 여자가 어떤사람이건 다 상관없이 좋지만 유방암만큼은 힘들다는게 그 남자의 입장이었습니다.
암 수술을 앞두고 어떤 사이즈로 복원을 할지 해맑게 고민하는 당사자와, 애써 울음을 참으며 친구를 위로하려는 친구들의 모습이 담긴 영상마다 요새 유방암은 생존율이 높아서 안죽고 산다는 댓글들이 심심치 않게 보이더군요.
지연이 유방암이라는 이유로 남자친구에게 차였다며 울던 장면까지는 에피소드 1에서 보았던 장면이 생각이 나 다시 첫 이야기로 화면을 돌려 그 장면을 다시 보기도 할 정도의 흥미였는데요, 댓글을 본 이후는 마음이 좀 많이 달라졌습니다.
사실 막판에 여주인공이 암에 걸렸다는 설정 치고 이렇게 유쾌하게 풀어낸 경우를 저는 처음봅니다.
아주 오래전, R.ef가 햇살 눈이 부신 날에 이별해봤느냐 하던 노래가 생각나는군요.
항상 캐릭터가 암에 걸리면 얼굴이 어둡게 변하고 힘들고 고생하고 아프다가 세상을 떠나는게 거의 대부분의 설정이던데, 암에 걸려보고 얼굴색도 변해보고 머리도 빠져보고 구토도 해보고 고생도 했지만 살아 남은 경우인지라 뭐랄까, 잘 죽지도 않는 암이니 심각하지 않다는 반응에 마음이 좀... "비오는 날 만큼이나 심했습니다."
저는 앞선 상황과 남자친구의 대사를 들으며... 남겨진 가족의 트라우마가 떠올랐습니다.
주양육자의 죽음을 목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빠나 엄마가 아프고 주사를 맞는 모습을 목격했거나 치료를 위한 이별을 경험했던 아이들은 상처를 안고 불안함과 눈치를 매번 누적해가며 살아가지요.
아직 우리의 인식은 암을 경험하는 당사자의 생존만을 바라보지만, 사실 우리의 의료기술은 생존의 차원을 넘어서고 있고 매년 암을 경험한 생존자는 늘어나고있지요. 하지만 생존 그 이후의 삶과, 그 생존을 위한 투병의 시기를 같이 겪어낸 가족 그리고 현실적인 삶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아직인 것 같습니다.
정말 별 생각없이, 오랜만에 머리가 깨끗해지도록 웃고 싶어서 보았던 드라마.
그 소재에서 엄마의 암을 경험했던 우리 아이의 이름이 나오고 그 배역이 내가 걸렸던 그 암에 걸렸다는 설정을 접하면서, 내 남편은 김지석처럼 생기지 않았고 나는 한선화가 아니고 그들같은 싱글라이프를 즐기지도 못했음에도 내 이야기인듯 아닌 듯 내 이야기 같은 기분은 무엇일까요.
처음엔 암이라는 존재에 대해 전혀 생각도 대비도 하지 못했을 젊은 나이에 암에 걸리고, 그 또래의 누군가는 암으로 아내를 잃은 애 딸린 홀아버지가 되었다는 접근이 신선했습니다. 늘어나는 젊은암 추세를 이렇게 보여주는구나 싶어서요.
수술 앞 둔 환자가 애써 해맑고 긍정적으로 그 시기를 지나가는 모습에서, 솔직히 저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긍정마인드로 스스로를 다잡아가는 지연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그 철없어보이는 모습이 어이없고 웃기면서도 짠했던 이유가 어쩌면 이것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시절을 담담하고 굳건하게 지나온 훌륭한 믿음의 자녀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남편은 육아휴직을 쓸 수 없었고, 당장 보낼 수 있는 어린이집이 없어 항암주사실과 방사선치료실에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독박육아와 독박투병을 해야 했던 그 시절은 지금 생각해도 암흑같았습니다. 남들은 아내가 아픈데 어떻게 그 흔한 휴직도 하지 않느냐 했지만, 흙수저에 외벌이 가장인 남편에게 그 흔한 휴직은 흔하게 손에 잡히는 대안이 아니었죠. 어느 봄이었던가요. 그 남자가 그러더군요. 끝없는 터널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고요. 그는 터널에 있는 기분이었나봅니다. 저는 비바람치는 사각지대에 세살배기 딸아이 손을잡고 서 있는 기분이었는데요.
죽을만큼 힘든 치료를 마치고 살아냈으니 나를 배려해달라는 말을 하는게 아닙니다.
다만, 의료선진국에 살아서 암 생존율도 선진국인 나라에 사는 우리는 왜 정말 죽을 수 밖에 없는 암에 걸린 경우여야만 심각하고 안타깝다고 생각을 하는지 생각을 좀 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괜찮은 암은 없습니다. 설령 약이 좋아서 치료가 된다 하더라도요.
새로운 접근과 소재로의 등장이 신선하고 반갑다가도, 인식개선의 길은 아직 멀고도 멀다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지는 밤입니다.
슬기로운의사생활에서 나왔던 임신성 유방암에 사람들이 그리도 안타까워했던건, 어쩌면 유방암으로는 잘죽지 않지만 임신 상황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특수성에 대한 반응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더해지며, 결국 누군가의 힘듦과 극복 같은 극적인 상황에서 위로와 관심을 찾는 소재로 소비하는 것 뿐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도 저는...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드라마를 찾아 기쁩니다.
아, 우리집 어린이 이름도 재희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한선화님 처럼 생기진 못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