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것처럼 보이지만

by 문성훈

“참 희한하지. 얘는 이렇게 지꺼는 줄창 씹어대면서 전선이나 일체 다른 걸 물어뜯거나 건드려서 사고치는 법은 없거든….”
딸아이가 사온 털실로 짠 터그가 또 다 풀어지고 헤졌다. 깨물면 삑삑 소리를 내는 오리장난감과 도넛장난감이 너덜너덜해진 지는 오래다. 터그도 벌써 몇 개째인지 모른다.
우리집 망고는 순하고 착하다. 짖는 법을 못배운 것처럼 조용하고 혹시라도 집안에 큰소리라도 나면 의자 밑으로 기어든다. 어디에 있건 제 이름이 불리면 한달음에 쫓아오고 꼬리가 끊어져라 흔들어댄다. 영리한 거야 밤에 원하는 게 있으면 영원한 소울메이트인 딸은 안깨우고 애꿎은 안방만 두드리고 그 앞에서 낑낑대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사람끼리의 인연이야 우연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다지만 반려견 망고와의 인연은 어느정도 예견된 것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4년 전 딸아이가 유기견 센터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을 때 나는 닥쳐올 운명 비슷한 걸 감지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지나지 않아 통속드라마의 한 장면이 우리집에서 펼쳐졌다.
밤 11시가 다되어가는 시각. 애비 모르는 자식을 안고 친정집을 찾은 것 마냥 이 가냘픈 생명을 안고 딸아이가 집안으로 들어섰다.
눈물 콧물 다 쏟으며 그날이 망고의 안락사가 예정됐던 날이었음을, 도저히 두고 올 수 없었다는 딸아이의 하소연을 들으면서도 나는 애써 냉정을 유지하려 했고, 그 상황을 외면해서라도 이전으로 되돌려놓고 싶었다. 아니 반드시 되돌려 놔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정과 연민으로 받아들였을 때 앞으로 겪게 될 불편과 구속, 근 10년을 애써 돌봐야하는 수고로움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한 식구가 된 이후로 망고는 원래 품성이 그랬는지 아니면 제 처지를 익히 파악해서인지 한 식구로 쉽게 동화됐고 사랑 받는 존재가 됐다. 거의 발작적이었던 남자 어른에 대한 공포는 어느듯 사라졌고, 집 밖을 나서면 버려질까봐 안달하듯 왔던 길을 거듭 되돌아보던 습관도 없어졌다.
그리고 지금은 망고에게서 우리 식구 중 누군가의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까불 때도, 선한 눈빛으로 말갛게 눈을 맞출 때도, 문 앞에 앉아 낑낑대며 제 얘기를 들어달라고 호소할 때도.
예컨대 반려견이 주인을 닮는다는 말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는 말이다. 자라 온 환경과 부모가 달라도 함께 오래 살아 온 부부가 닮아가는 것처럼.
나는 위협이 없는데도 앙칼지게 짖는 반려견을 보거나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의젓한 반려견을 만나게 되면 주인을 한번 올려다보는 버릇이 생긴 지 오래다.

생명을 가진 유기체만 그런 것도 아니다. 집도 집주인을 닮는다. 가게에 들어서면 주인을 대면하지도 않고도 어느정도는 짐작하는 바가 있다.
주어진 공간을 자신의 손길로 매만지고 자신만의 장소로 가꿔가는 사람들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자신을 소개한다. 취향과 성품, 추구하는 바가 그대로 공간에 배여들고 자연스럽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업으로 하다보니 지인의 집을 방문하거나 작업장을 찾게 되면 평가나 개선점을 말해주길 요청받는 경우가 간혹 있다.
나는 되도록 언급을 회피하거나 아주 단순하고 쉬운 팁 정도만 예의상 알려주게 되는데 이는 이미 공간과 그 곳에 머무는 사람이 이미 일체화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간은 그야말로 속이 비어있는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 안을 채우는 채광, 색감, 조명 그리고 집기와 사람이 이야기거리와 정서로 생명을 불어넣은 누군가의 특별한 장소로 만들었고, 이미지로써 거의 모든 것을 표현하고 말해주는 것이다.
시험까지는 아니지만 내 사무실을 방문한 고객이나 지인이 유리문을 열고 내 방에 들어섰을 때 보이는 행동을 관찰해보면 얼추 비슷하다.
쇼파에 앉으려다 말고 장식장에 진열된 갖종 수집품들과 유리테이블 안의 테라리움에 관심을 보이며 질문하는 것이다. 이는 내가 호기심도 많고 여러 방면에 관심을 갖는 성향과 자연에도 애착을 지녔다는 걸 보여준다.
출입문과 90도 방향으로 틀어서 창을 등지고 배치된 책상의 위치에서 방문자를 경계하거나 위압하기보다는 받아들이고 수용하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다면 그건 다행이다.

게다가 쇼파에 어지럽게 널린 옷이나 가방 심지어 담요를 한 켠으로 치워 앉을 자리를 마련하는 내 모습을 유의 깊게 관찰한 사람이라면 내 방이 접견실의 용도보다는 온전히 작업실이나 연구실로 여기는 비교적 자유롭고 산만한 성격의 소유자인 걸 알아챌 것이다.
더 나아가 크고 긴 책상 테이블에 놓인 조각도들이며 도구들, 긁적이다 만 종이들, 가지런히 정렬되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여러 무더기로 쌓인 책들을 보면 내가 직접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급한 성격의 행동파이며 지적으로는 갈급하지만 아직은 완결되지 않은 미성숙한 사람이란 것까지 간파할 것이다.

하물며 비교적 공통분모가 많은 혈연으로 맺어진 여러 가족 구성원들과 집안 분위기를 선도하는 주부의 손길을 지울래야 지우기 힘든 집이나 뚜렷한 목적과 추구하는 방향을 설정하고 만든 작업장에서는 공간을 채운 일관된 컨셉을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사리 알아채고 사용자를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다만 적확하게 설명하고 연관성을 해석하는데 부족할 뿐이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과 공간에 머무는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 사람은 공간의 넒이, 체적, 부피, 주변 환경에 심리적 영향을 받고, 어떤 식으로건 자신의 성향을 반영시킴으로써 안정감을 추구하고 일체감을 꾀한다.

자신을 둘러싼 환경 즉 방위, 면적, 구조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비교적 자유가 주어진 공간을 채우는 색감의 조화, 집기의 형태나 크기, 배치 그리고 조명의 밝기와 온도 등을 통해 은연 중에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집을 보면 주인을 알 수 있고, 작업장을 보면 추구하는 바를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집주인과 집, 사람과 공간은 그렇게 어느덧 서로를 닮아가고 서로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말은 숨을 쉰다는 뜻보다 언제든 변화하고 서로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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