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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문성훈
Mar 05. 2023
봄바람
"지난 주에 전화 주셨더라구요. 이게 몇 년만입니까? 죄송합니다. 자주 생각이 나는데도 왠지 시간이 자꾸 흐르니까 그것도 겸연쩍어지더라구요. 죄송하기도 하고...."
"별 말씀을..... 궁금해하면서도 저 역시 연락드리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ㅇㅇ에 계신거죠?"
그는 20년 전 내가 인테리어했던 병원의 원장이었다. 서울태생에 서울 의대를 나왔다. 지금은 연고도 없는 남쪽 지방에서 페이 닥터로 일하는 시골의사다.
20년 전 첫 만남이 있었던 그날.
"실은... 인테리어 회사를 소개해주십사 주변에 부탁 드리긴 했어도 이렇게 여러 업체일 줄은 몰랐습니다. 어째야 할지..." 나를 제외한 업체들은 개의치 않고 시안을 제출하겠다고 했다.
"아닙니다. 그래선 안되지요. 채택이 안된 세 업체도 시간과 공을 들인건데 마땅히 소정의 사례를 하는 게 맞습니다. 그럴 수 없다면 저는 빠지겠습니다" 모두의 이목이 내게 쏠렸다.
곤혹스러워 하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럼 제가 여러분께 현장을 안내하고 다른 요구사항이나 필요한 내용은 서면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거기에 채택이 안된 분들께 제가 제시할 사례도 명시하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겠습니까"
많은 인테리어 프로젝트를 해봤지만 의뢰인의 그런 반응은 무척이나 드물다. 내겐 첫 경험이라 신선하기까지 했다.
같은 날 네 업체는 빠짐없이 프리젠테이션을 했고 며칠 뒤 우리 회사 안이 채택됐다는 통보를 받았다.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가 말했다.
"실은 첫 미팅에서 사장님을 마음 속으로 낙점했더랬습니다. 아... 오해는 마시고요. 시안도 물론 제일 마음에 들었고요"
"왜 처음부터 낙점을 하셨는데요?"
"뭐랄까... 프로 같으셨거든요. 디자인 비용 그 말씀하실 때... 소신도 자부심도 있으신 것 같아서 시안이 기대가 됐었습니다. 하핫"
그렇게 맺은 인연이었다. 내가 아는 몇 안되는 참의사였는데 그래서인지 병원 규모가 점차 쪼그라 들었다.
그가 수도권에서 운영한 마지막 병원도 내게 부탁했다.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잔금을 받지 못했다. 천천히 갚으라고 했었다.
그리고도 꽤 긴 시간이 흘렀다. 그가 개인회생절차를 밟는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지방에 페이닥터로 간다면서 "반드시 빚을 갚겠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전화를 했다고 했다.
나는 잊었노라고 했다. 벌써 잊었으니 마음에 두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꽤 오랫동안 나는 협력업체에게 공사대금을 나눠 갚았다.
이후로도 1년에 한두번은 안부를 물어 근황을 알고 있었는데 코로나 기간동안 격조했었다.
그런 그가 두달전 회생절차를 마무리했다고 했다. 조금은 홀가분해졌으니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지방에 의원을 낼 구상도 하는 중이라고 했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주겠다고 나선 모양이다.
나와는 동갑, 결코 순탄하게 살진 못했지만 사람까지 잃지 않은 것 같았다.
"결정된건 아니고... 아직은 이런저런 생각만 하고 있습니다. 한동안은 여길 더 봐줘야 할 것 같고요..."
"네. 이젠 신중하게 판단하셔야죠. 아무튼 ㅇㅇ 가게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한번 오신다더니 못뵀습니다. 꼭 오세요. 소주 한잔 하면서 밀린 얘기 좀 하게요."
지금 남녘에는 봄이 도착했을지도 모르겠다. 점점이 박힌 섬의 어린 쑥은 벌써 머리를 내밀었겠다. 아차 시기를 놓치면 제 맛을 볼 수 없는 '도다리쑥국' 먹으러 갈 핑계가 생겼다.
아! 도다리쑥국은 해장에 그만인데 그럼 어쩔 수 없이....
ㆍㆍㆍㆍㆍㆍㆍ
봄도다리쑥국
- 윤 성 학
남해에 봄이 오면
바다는 들숨이 커져 어깨가 부풀어 올랐다
바다를 떠다 된장을 풀고
... 바늘에 봄을 달아 낚은 도다리를 넣는다
쑥을 뜯어다 헹궈 넣고
봄도다리쑥국 한 그릇이면 되겠다
뻘에 숨어서 기며 세상을 한쪽으로만 흘겨보다가
눈이 한켠에 몰린 것들
덤불쑥마냥 마음이 뻐세어
이 사람 저 사람 치대는 것들이라면
봄도다리쑥국 한 숟갈만 떠먹어봐도 알겠다
남녘 바다에서 깨어난 봄이
저 어족과 어떻게 눈을 맞춰 봄바다에 춤추게 하는지를
해쑥 한 잎이라도 다칠세라 국을 끓여내
거칠고 메마른 몸들 대접하는 그의 레시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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