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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누 Jul 19. 2023

연민하지 않고, 나란히 서기

우리는 모두 하나의 인생을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무의식적으로 체화한다. 어른이 되어갈수록 ‘나’에 가까워지지만, 언제나 ‘나’의 삶 속 갇혀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공감 능력을 통해 다른 존재가 되어 세상을 바라본다. 물론 그 또한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하여 ‘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긴 하지만, 공감 능력이 없었다면 인간은 함께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감’은 사라질 수는 없으며 사라져서는 안 되는 인간의 본성이다.


‘공감(共感)’은 ‘나란히 서는 것’이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온 타인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이 되는 것이다. 머릿속 이해를 넘어 그 사람의 상황을 알고, 그 사람의 기분을 같이 느끼는 ‘공감’ 과정은 ‘나’를 바라보는 최선의 길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본격적으로 살게 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더 이상 외국인 관광객처럼 구글지도를 보면서 두리번거리지 않지만, 나는 여전히 수많은 시선 속에 산다. 생김새가 다른 아시아 사람이기에 누군가는 인사를 하고 싶어 하고 또 누군가는 작은 돈을 요구한다. 단지 GDP가 높은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우월감을 갖고 국민성을 재단하거나, 지나치게 상대방을 연민하고 싶지 않다. 시선을 마주하며 공감하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래 생각하는 요즘이다.


조심스럽게 다가와 돈을 달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애써 무시할 때마다, 나는 이태준의「달밤이 떠오른다. 이태준의 「달밤」은 1933년 발표된 단편 소설이다. ‘나’와 ‘황수건’이라는 사내가 엮어내는 이야기이며, 우둔하지만 순수한 ‘황수건’이 각박한 세상에서 아픔을 겪는 모습을 보여준다. ‘나’는 어렵게 살아가는 ‘황수건’을 연민하여 ‘동전 삼 원’을 쥐어주기도 하지만 그는 홀라당 밑천을 까먹고, 훔친 포도를 선물로 들고 와 ‘나’를 곤란하게 만들기도 한다. ‘나’가 나무 그늘에 몸을 감추고 ‘황수건’을 바라보며 던진 ‘달밤은 그에게도 유감한 듯하였다.’라는 문장으로 소설이 마무리된다. 작가 이태준은 소설을 통해 ‘황수건'이라는 인물의 사람됨과 그러한 인간이 살아갈 수 없는 세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설이 발표된 지 1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 세계 경제는 겉보기에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황수건’이 살아가던 때보다 더 차갑고 냉정하다. 눈으로 보이지 않지만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과,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지 않는 체제 안에서 더 많은 ‘황수건’이 생겨났다. 무분별한 시장주의 하의 집단적인 외침은 지나친 국가 간 불평등과 경제 불안을 초래하고 있고, 그 사이 기득권층은 자신들의 권력을 확대했다. 소외된 개인도, 패권 경쟁에 파묻힌 국가도, 거대 권력에 동조하는 방향으로는 더욱더 자신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동전 삼 원’을 쥐어주는 것만으로는 우리 자신을, ‘황수건’을 지켜줄 수 없다. '달빛'만으로 치유되기 어려운 차갑고 냉정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현실에 안주한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돈을 달라는 손짓에 단돈 얼마를 쥐어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상대와 시선을 마주하기 위해 상대를, 그리고 나 자신을 때려눕히는 일(Assommons les pauvres, Baudelaire)이다. 머나먼 땅 르완다에서 살며, 나는 진정 나의 것처럼 이 사회의 문제를 주체적으로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 연대할 수 있을까? 연민하지 않고 나란히 서기 위한 끊임없는 행동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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