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록을 시작한 이유
나는 어떠한 형태로든 순간을 기록하고 저장하는 행위를 좋아한다. 그것이 사진이든, 영상이든, 조악한 글의 형태이든. 하지만 일기라는 건, 매일매일 써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어서 그런지 늘 꾸준히 하는 게 어려웠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내 인생에서 다시 오지 않을, 또 얼마나 지속될지 알 수 없는 이 시간들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기록하고 싶었다.
런던에 오기 전, 좋아하는 환기미술관에서 무지 노트를 한 권 구매했다. 초반에는 열심히 그날 느낀 감정들과 있었던 일들을 매일 기록하곤 했는데, 어느 순간 내 감정을 마주하는 게 힘들게 느껴졌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내 일기장 속에는 어둡고 힘든 감정들만 늘어놓고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일기장 속 날짜는 일주일, 이주일, 거의 한 달씩의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이곳에서 매일매일 느끼고 받아들이는 수많은 인풋들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이렇게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 브런치 작가를 신청했다. 하지만 막상 승인 메일을 받고도 어떤 글을 써야 할지 뚜렷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며칠을 미뤄두었고, 드디어 얼마 전 첫 글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오랜만에 온 비가 반가웠고, 창문 위에 떨어지는 타닥타닥 빗소리는 차분한 아침 분위기를 만들었다. 적당히 선선한 바람과 적당히 어두운 하늘. 오랜만에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두고, 책을 읽다 보니 글이 쓰고 싶어졌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생각 조각들을 놓치기 싫어 메모장에 적다 보니 어느새 말하고 싶은 주제들이 꽤 생겼다.
나는 계속성의 힘을 믿는다. 어떠한 형태로든 기록한다는 것은 결국엔 나의 큰 자산이 될 것이니까. 이 여정의 끝이 어디로 향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차곡차곡 글들을 쌓아가다 보면 생각지 못한 길로 연결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방인으로서 타지에서 살아간다는 건, 맥주 한 잔 할 동네 친구도 없고 매일 얼굴 보며 부딪힐 가족들도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연스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되면서 나는 이 시간들을 통해 나 자신을 면밀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무엇에서 가치를 얻는지, 어떤 것에서 힘을 얻는지, 어떤 것에서 무너지는지. 그중 일부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기도 하지만, 어떤 것들은 완전히 새롭거나 잠시 잊고 있던 것이라 낯설게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다. 물론 어떤 것들은 너무 적나라해서 스스로가 속물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혼자 독립을 한 후 가장 좋은 점은 정말 예상치도 못한 부분이다. 바로 혼자라서 마음껏 울 수 있다는 것. 점처럼 미미했던 사건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선명한 선이 되어 나를 무너뜨리는 날도 있었고, 순식간에 불어나는 생각들의 고리를 끊어내지 못해 그 무게에 짓눌려버린 적도 있었다. 바로 이렇게 날 것의 감정들을 온전히 혼자 마주하게 되는 날들은 감정을 다 쏟아내고 나면 개운해지곤 한다. 누군가에게 그 감정의 배경을 설명해야 할 필요도 없고, 주변 분위기나 상대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의외의 해방감을 선사해 준다.
이 모든 과정들은 때때로 나를 괴롭고 힘들게 하지만, 밀도 있게 이 시간들을 겪어내고 나면 내가 나로서 조금 더 단단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양한 경험들을 통해 나의 사고를 확장시키고 경험치를 쌓아 시간이 지날수록 지혜롭고 현명하게 나이 드는 것> 이 나의 중심 가치관인데, 이 낯선 곳에서 내가 크고 작게 도전하는 모든 것들, 경험하고 마주하고 연결되는 모든것들이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에 더 가까워지는 과정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