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식견으로 가진 잘못된 확신
사업은 위험성이 크다. 규모가 커질수록 그 위험성도 커진다. 요즘은 글쎄, 워낙 성숙한 아이들이 많아 어떨지 모르겠지만 2000년대에만 해도 어린이들이 알기엔 모호하고 추상적인 이야기였다. 국민체조보다 새천년 국민체조를 먼저 배우며 초등학생이 되었던 2000년도의 나는 초등학교를 채 졸업하기도 전에 이미 사업은 그저 위험하고 나쁜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기억하는 시점부터의 우리 집은 사업실패로 인해 빡빡한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주 어려워 당장 거리에 나앉아야 했던 것은 아니지만 당장 하루하루 먹고살기 바쁜, 그런 급하고 여유 없는 상황이었다. 경제적인 불안정함이 단순히 절약하고 아끼며 사는 삶의 방식으로 해결된다면 우리나라가 이렇게 자본주의에 미치지 않았을 거라 확신한다. 물질적인 결핍은 결국 마음이 가난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힘든 상황에서 시작해 서로 아끼며 앞으로 나아가는 상황이었다면 좀 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종종 든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유소년기는 풍요에서 결핍으로 악화되는 양상이었고 그에 따른 삶의 피폐화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문제는 겉으로 보기에 나는 아주 유복하게 자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언제나 손꼽히는 부자 동네의 값비싼 아파트에서 살았다. 상황은 나쁜 편이었지만 주거를 위협당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질적인 어려움으로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호소하려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나는 결코 어려운 집에서 자란 아이는 아니었다. 따져보자면 잘 사는 편이 맞았다. 다만,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여유로웠던 생활을 한 순간에 다 잃은 환경이었으므로 모두가 정신적으로 아주 가난한 상황이었다.
보여지는 것과 실제 삶에서 오는 괴리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초중고 모두 집 근처 공립학교를 나온 내게는 같은 동네에 사는 물심양면으로 모두 풍요로운 친구들이 생겼다. 대부분의 친구 부모님들은 좋은 회사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계시는 능력 있는 직장인, 교수, 때로는 전문직이었다. 매달 걱정 없이 월급이 나오니 가끔 외식도 하고 가족들끼리 여행도 가는 평범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에겐 그런 평범한 일상은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범위 내에서 나는 제대로 된 외식을 해 본 기억이 딱 한 번 있다. 중학교 졸업식 날 어느 고깃집에 가서 갈비를 먹었던 것 같다. 그 외에는 가족 여행도 외식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딱히 원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의 가정환경에서 그러고 싶지 않았을 뿐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이 그렇게 평범하게 행복한 모습은 부러웠다. 한 가닥 남은 자존심으로 겉으로는 전혀 부러워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누가 봐도 문제 있어 보이는 가정환경이니 대신 경제적인 걱정이라도 없어 보이고 싶었다. 그 당시 내 인식 속 여유 있는 집은 그런 평범하고 일상적인 행복에서 조금 멀더라도 바빠서 그러려니 사람들이 쉽게 납득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타인의 시선에 민감한 사람으로 자라나게 된다. 내가 괜찮은 척만 잘한다면 적당히 잘 사는 사람처럼 보이기는 쉬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학원, 대학으로 진학하며 같은 동네에서 서로 어디 사는지 다 아는 친구들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알고 보니 내가 살던 아파트는 타 지역에서 온 갓 스무 살이 된 친구들도 로고를 보고 알아챌만한 유명한 곳이었다. 그렇게 나는 ‘부자’로 불리게 되었고 나 스스로도 점점 스스로를 꾸며내는 것이 어렵지 않아 졌다. 보고 참고할 만한 케이스는 주변에 넘쳐났으니.
이 혼자만의 고군분투를 조금 더 마음 편히 하기 위해서는 남들 보기 번듯한 직장을 가져야 했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며 열심히 공부했고 수능을 준비하는 동안 성적이 꽤 잘 나왔다. 큰 이변이 없다면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학을 들어갈 것이라 예상했지만 이상하게 수시는 예비 1번으로 떨어지고 수능은 애매하게 못 봐서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낮은 성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그래도 좋은 대학이었다. 문제는 내가 몰랐다는 데 있지만. 이 정도 대학으로는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없다는 어리석은 판단을 했다. 내가 아는 좁은 세상 안에서 사업과 좋은 직장(이름 아는 대기업 몇 군데)을 빼면 남는 건 공무원이었다. 학벌로 차별받지 않고 여자도 안정적으로 다니며 망할 걱정 없이 월급이 따박따박 나오는, 어디 가서 떨어진단 소리 듣지 않을 만한 이 평범한 직업은 아주 완벽하지는 않지만 괜찮은 선택지로 보였다.
이 생각에 확신을 준 것은 변화된 우리 집 상황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 우리 집은 매달 들어오는 수입만으로 가족 부양이 힘들 만큼 쪼들렸던 시기를 지났다. 엄마가 새로 시작한 작은 사업이 잘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내가 살던 동네 기준으로도 괜찮다고 표현할 수 있는 정도로 월 소득이 늘었지만 여전히 삶은 어려웠다. 이미 나를 둘러싼 환경은 망가진 후였고 돈이 잘 벌려도 사업을 하니 마음은 계속 가난하다는 생각은 확신으로 자리 잡았다. 지긋지긋한 인생을 벗어나기 위한 해결책으로 선택할 수 있는 건 내가 가지게 될 직업뿐이었으므로 결론은 같았다.
대학생활 내내 나는 '어차피 공무원 할 거야!'라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니며 열심히 놀기 시작했다. 전공이 적성에 맞지 않기도 했지만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지 않을 명분에 불과했다. 게다가 말이 열심히 놀았다지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 누워있는 시간이 가장 길었음을 돌이켜 생각하면 우울증으로 인한 번아웃 증세와 무기력증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공부를 꽤 잘했던 가락은 유지가 되어 만 23세가 된 며칠 뒤, 나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