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우, 난 저렇게 되고 싶지 않은데
내가 시험을 본 시점 즈음에 공무원 시험은 이미 과열 되어있었고 경쟁률이 100:1 근처를 선회했다. 운이 좋으면 1년, 길게는 2년 이상의 청춘을 그대로 바쳐야 하는 시험이다 보니 준비하는 기간 동안의 고생을 떠올렸는지, 입직 동기들은 대부분 공직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품고 잘해보려는 신입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운이 좋아 비교적 수월하게 시험에 합격했고, 안정성만을 고려해 직업을 선택했던 난 처음부터 공무원에 대한 일말의 관심도 없었다. 행정법을 배우면서도 판례에 등장하는 공무원들은 나와는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대단히 사회에 기여해 보겠다는 마음이나, 공무원으로서 자아를 실현하겠다는 마음도 당연히 없었다.
물론 주어진 일을 최선을 다해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잊고 있던 사실이지만 얼마 전 우연히 펼쳐본 근무 첫 해의 업무수첩에는 그 때의 기억이 빼곡히 담겨있었다. 기존의 담당자가 해오던 방식을 벗어나 실적을 끌어올릴 수 있는 아이디어를 내고, 조금이라도 더 비용을 절감하여 같은 예산 안에서 최대의 효율을 내려고 노력했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큰 비중은 없는 사업이었지만 당시 서울시 자치구들을 줄 세워 경쟁시키는 구도였고 성적이 좋으니 윗사람들의 '내세울 거리'가 되었다. 주말을 바쳐가며 일 한 결과로 최우수구로 선정되니 뿌듯했다. 그렇지만 그게 다였다. 나에 대한 기대는 올라갔고, 잘해냈으니 앞으로는 더 잘하라는 닦달의 시작이었다.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해가며 이런저런 일을 다 떠밀었다. 서무주임의 역할인 보고자료 편집하기, 팀내 최고참이 해야 하는 주간회의자료 수합하기, 중도 육아휴직자의 업무 메꾸기, 같은 팀의 동료가 못하겠다고 미룬 일을 대신해 맡기, 그 와중에 내게 배정된 일은 그대로 잘 해내기.
이 때는 내가 일을 많이 하고 있다는 자각도 하지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거나 시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그런 사람이 있다는 것조차 상상을 못 했던 시절이었다. 대학시절 경험했던 팀플에서 만난 무임승차는 연락을 받지 않고 잠수를 타거나 맡은 바를 엉망으로 해와서 간접적으로 불특정 인물에게 일을 미루는 형태였지 직접적으로 누군가를 꼭 집어 대놓고 일을 시킨다는 건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천인공노할 일이었다. 하도 당당하게 시키니까 드라마에서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일 시키는 장면과 같은 것인 줄 알고 처음에는 군말 없이 했다(바보가 따로 없네..). 게다가 사회생활 자체가 처음인 데다 공직생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이 정도 일은 하는 줄 알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성격도 한몫했다. 모두 앉아서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는 것을 그때는 상상도 못 했다. 각자 자리에서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으니 그저 일하는 줄로만 알았다.
이 상황이 부당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이미 늦은 시점이었다. 나는 시키면 하고, 잘 해내기까지 하는 직원이었다. 깨달았으니 마냥 당하기에는 억울했기에 부당해 보이는 일에는 목소리를 냈다. 하도 사람들이 일을 안 하려고 하니 듣기 싫은 소리를 해야 조금이라도 조심하고 덜 미룰 것 같다는 판단 하의 선택이었는데, 최선이었다고 생각했지만 최악의 결과를 낳았다. 일은 일대로 하고 싫은 소리를 덧붙임으로서 약간 면을 깎아먹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할 말을 따박따박 다하며 상대를 당황스럽게 만드는 당돌함이 있지만 어쨌든 계속해서 우겨 하기 싫은 일을 떠넘기면 끝까지 버티지는 못하고 일을 받아가는, 똑똑한 듯 보여도 어쨌든 '신입은 신입'이었던 나의 속에는 점점 화가 차오르고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이상한 사람들을 한 데 모아놓은 곳이 있다니.. 그것이 우리 사무실이라니.. 매일같이 현타가 왔지만, 그래도 저 사람들이 하면 오래 걸리지만 내게는 별 일 아니니 마음 편히 빨리 해치워 버리고 말자는 생각으로 일을 했다. 의외로(?) 이 와중에도 항상 웃으며 다녔고 예쁨도 많이 받았다. 부서장의 공식 최애직원은 나였고 다른 직원은 뭐가 좋아 매일 웃고 있냐는 말을 할 정도였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만 2년이 지나고 승진을 위한 서열이 떴을 때, 나는 33명의 동기 중에 32등이었다. 언제나 우등생으로 살아와 전국에 내로라 하는 아이들만 모인 재수학원에서도 받아 본 적 없는 등수였다. 애초에 기대가 없었기에 중간 쯤이었으면 만족했을 것이다. 아니, 적어도 꼴찌인 게 티가 안 났다면 좀 나았을 것이다. 승진 예정자 수에 따라 승진후보명부에 뜨는 인원수가 달라지는데, 동기 중 나를 포함한 2명만 빼고 모두 명부에 올랐다. 다른 동기들이 어떻게 일을 했는지를 떠나서 내가 1년간 이런저런 사람들의 일을 떠맡고 맡은 일에서 모두 좋은 성적을 냈다면 적어도 이런 성적표를 받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을 치열하게 경쟁시키는 상대평가의 늪에서 살아왔지만, 다른 사람들이 어떤 점수를 받든 나만 잘하면 상관없다는 굳건했던 나의 신념이 통째로 흔들리는 일이었다.
사무실 선배들은 모두 원래 그런 거라며 날 위로했다. 내가 배치받은 부서는 힘이 없고, 부서장이 신경을 안 쓰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혀 납득이 가질 않았다. 부당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내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내가 내는 목소리는 뒤쳐진 도태인간의 불평불만밖에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공조직의 특성상 다른 직원과 나의 업무를 서로 비교할 수 있는 객관적인 지표도 없었으므로 그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이게 시발점이었다. 이 외에도 무수히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공직사회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전까지는 별다른 인센티브가 주어지지 않더라도 내가 내 할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었다는 성취감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성적표가 처참한 몰골이었기에 모든 의욕을 잃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일을 덜 하고 손해를 덜 보려 안간힘을 쓰는 삼촌 이모뻘의 동료들이 추해 보였지만 동시에 이해가 갔다. 이 조직에서 영리하게 버티려면 저렇게 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으나 나만큼은 저렇게 변하고 싶지 않다는 강한 거부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흔히들 퇴사 욕구를 느끼기 시작한다는 369중 딱 3년차, 공무원을 그만두기 위한 치열한 짱구 굴리기가 시작되었다.
* ‘연공서열’, ‘나도 안 잘리지만 저 놈도 안 잘린다’, ‘업무과중’ 등의 뭉뚱그린 추상적인 어구들로 표현되는 공직사회의 민낯은 후에 낱낱이 서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