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몰라 뭐해먹고 살지
아무튼 그렇게 2020년 초, 그만 둘 마음을 먹고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을 했다. 마침 새로 온 부서장의 직장내 괴롭힘은 제보만 하면 9시 뉴스에 날 정도로 심각했고 자존감은 더 깎여가는 상황에서 내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인문학 전공자는 공무원을 준비할 생각에 취직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는 예술 계열의 복수전공을 선택했고 학점마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밥벌이를 할 만한 특출난 재능도 없었다. 적당히 괜찮게 보이는 번듯한 직업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백방으로 고민해 봐도 결국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내 능력 범위 안에 들어오는 직업은 말단 공무원뿐이었다.
우선 우리나라 공무원이 활용할 수 있는 인사교류 제도를 이용해서 다른 자치구로 적을 옮겼다. 얼핏 이전 근무지처럼 몇십 년 전 영화에나 나올 법한 후진적인 관료 조직은 아닌 듯 보였지만 복지가 좋고 좀 더 쉬쉬하는 분위기일 뿐 조직이 돌아가는 원리는 근본적으로 같았다. 이 때 워라밸이라도 좋다는 교육행정직을 잠깐 고려했으나 어딜 가나 비슷한 공무원 조직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이 들어 그만 두었다.
그러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던 외무영사직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했고, 어릴 때 1달 정도 머물렀던 아프리카에 좋은 기억이 있으며(가장 기피하는 험지가 아프리카니 선뜻 가고싶다는 생각이 드는 나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새롭고 낯선 환경을 즐기는 편인 내게 구미가 당기는 선택지였다. 게다가 언젠가 해외에서 한인민박이나 가이드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었으니 해외생활을 먼저 경험해보고 나아가 한인사회와 네트워크를 만들 기회까지 잡을 수 있는 좋은 선택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과는 다르게 의욕이 넘쳤다. 시험을 보기 위한 자격 조건인 한국사능력검정시험 1급, 제2외국어 자격시험 점수, 토익 점수를 만들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출근 전, 퇴근 후 합쳐 평일 2~3시간 정도를 공부했다. 쉽지 않았지만 목표가 있으니 즐겁게 느껴졌다. 나름대로 준비를 잘 해나가고 있던 차에 교육행정직보다 더 워라밸이 좋다는 근무처로의 교류 기회가 생겼다. 옳다구나 언제나 떠날 생각이 가득했던 나는 그 기회를 덥석 물었고, 이전의 6년이 억울할 정도로 현재 편한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처음의 악몽같던 사무실이 꿈 같이 느껴질 만큼 몇 년째 동료들은 좋은 사람들이고, 이미 7년차에 접어들어 새로 맡게 되는 일도 빠르게 적응해 잘 해낼 역량이 충분한 상태다.
이렇게까지 좋은 동료들과 편안하고 잔잔한 일상을 보내는 중인데도 왜 나는 이곳이 싫을까? 외무영사직 공부를 꾸준히 하는 동시에 치열한 고민도 다시 시작됐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한마디로 축약할 수 있었다. 10년 후의 나를 상상하기 끔찍했다. 이 조직에 남아있는 나의 모습은 눈앞이 캄캄해 상상속에서 조차도 그려낼 수가 없었다. 내가 마주하는 개개인의 동료와 상사는 당장 나쁘지 않았지만 언제라도 처음의 그 끔찍한 사무실과 비슷한 처지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으며 이렇듯 발전을 모르는 공무원 조직 자체에 대한 환멸도 여전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버텨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도 계속해 들었다.
나만 이런 건가 싶어 주변에 있는 모든 젊은 공무원에게(어림잡아 30명도 넘을 것이다) 평생 이 직장을 다닐 것이냐 물어봤는데 너무 싫지만 할 것이 없으니 그냥 버틸 것이라는 대답이 주류였다. 그 안에서 그래도 이만한 직장이 없지라는 뉘앙스도 읽을 수 있었다. 덧붙여 10년 후에 이 조직에 있을 모습을 그려보면 무슨 생각이 드냐는 질문에는 대체로 다행이라는 답을 들었다. 나처럼 다른 살길을 찾기 위해 구체적인 노력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나가서 뭐하려고? 뭐 할 줄 아는 거 있어? 아깝지 않아?
관두자는 마음을 먹을 때마다 주변에서 하는 말이었다. 다른 경력은 전무한 공무원에게 공직사회 밖은 쳐다도 봐서는 안 되는 위험한 곳이었다. 이곳은 지옥일지언정 나의 삶에 큰 타격을 줄 만한 파동은 만들어 낼리 없는, 조용하고 안전한 곳이니까. 나 스스로도 뭐해먹고 살지? 싶어 무서웠고 과감히 결심하지 못했다. 2020년 초부터 고민했지만 2024년 7월 글을 쓰는 현재에도 여전히 공무원 조직에서 누가해도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으니.
그러던 어느 날, 이대로 빙빙 돌아가면서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외무영사직 공부도 그만두었다. 말이 쉽지, 현실적으로 나의 계획은 너무 허무맹랑했다. 합격 후 한국에서 2년 근무하고 나면 먼저 아프리카로 지원해서 근무한 다음, 험지에서 근무한 인센티브로 원하는 나라에 발령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중간의 2년 한국 근무가 끝나는 대로 은퇴 후 한인민박을 열고 싶은 나라로 간다. 그곳 한인회와 인적 네트워크를 만들고 문화에 익숙해지며 내가 이 생활에 잘 맞을 지를 판단해보고 잘 맞으면 꿈에 그리던 미래를 준비해본다.
당장 원하는 대학을 가고 싶다는 바람조차도 못 이룬 마당에 나의 노력과 의지로 관여할 부분이 10%도 안되는 공무원 사회에서 저 모든 단계를 차근히 밟아 올라갈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사실 현실적인 가능성은 0에 가까웠다. 게다가 그 극악의 확률을 뚫고 다 이룬다고 쳐도 소요되는 시간은 대충 어림잡아도 14년이었다!
14년을 돌아서 갔는데 내 적성에 안맞는다면? 심지어 외교부도 공무원 조직이니 내가 지금껏 경험한 3개 기관과 결을 같이 하거나 더 보수적일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14년을 더 참아서 그런 결말을 맞는다니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그때 깨달았다. 그만 둘 용기가 부족해 그저 현실을 잠시 잊을 수 있게 도와 줄 꿈이 필요했었던 것을.
원래 시험볼 때도 꼭 고친 답이 틀린다. 처음 내가 답을 골랐을 때에는 그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텐데 이런 저런 불순물들이 개입하며 최초 생각의 흐름은 홀라당 까먹어버린 채로 엉뚱한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그만두겠다는 마음은 먹었지만 앞으로 무엇을 할지가 막막해 거기에 몰두하느라 최초의 생각은 자꾸 잊곤 했다. 그렇게 4년 간 뫼비우스의 띠 위를 참 쉬지도 않고 걸었다.
2024년의 어느 날, 불현듯 이 정도면 일과 고민 모두 충분히 했다는 확신이 들었다. 적어도 너무 성급하게 결정했다는 후회는 남지 않을만한 긴 숙고의 시간이었다. 점점 더 꼬여만 가는 복잡한 머릿속을 풀어내어 스스로에게 그만두고 싶냐는 딱 한가지의 단순한 질문만 던져보았다. 여전히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해먹고 살지는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 또 어떤 결정을 내리고 그 방향으로 걸어간다면 지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위 내의 인간이 될 것이라는 것은 알겠다. 그래서 뭐해먹고 살지도 모르는 채로, 말 그대로 대책 없이 이 안온한 지옥을 벗어나 정글로 향하려고 한다. 이 모든 설레고 즐거운 과정을 글로 담을 것이다. 혹시나 나중에 내 선택이 후회된다면 지금의 이 마음을 꺼내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