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 아닌 거 나도 압니다
한참 머리가 복잡하던 2024년 초, 친구와 호주여행을 갔다. 고작 10일짜리 여행이지만 해외살이를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내가 여기서 살 수 있을지를 고민하며 여행에 임하기로 했다. 운이 좋게 많은 사람과 대화해 볼 기회를 만들었고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형태의 삶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전세계를 옮겨다니며 영상일을 하고 있던 이탈리아인,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호주로 건너와 소셜미디어 마케터가 된 영국인, 호주에서 약사로 일하고 있는 한국인, 호주 공무원이 된 모리셔스인, 장학금을 받고 호주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에 성공한 사실 상 미승인국가 출신의 사람. 이외에도 대체 뭐해먹고 사는지 도저히 짐작도 안가는 사람도 다수였다.
제일 기억에 남는 사람은 멜버른에서 만난 한국인 가이드님이었다. 10여년 전, 40대의 나이에 안정적으로 다니고 있던 은행을 그만두고 온가족이 다 같이 호주로 이주하여 영주권까지 취득했다며, 그 때의 선택을 전혀 후회하지 않으신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대학을 졸업한 후 18년의 직장생활 동안 본인 스스로가 사람들과 어울리고 술을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일터에서 보내는 시간과 비교하여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이 턱없이 적다는 사실을 깨닫고 삶의 방향을 바꿀 결심을 했다고 한다. 호주에 와서 자기자신을 돌볼 시간이 늘어나자 마흔이 넘은 나이에 그제서야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에 큰 거리낌은 없지만 조용한 방에 앉아 홀로 책을 읽는 시간을 훨씬 더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은행에 꾸준히 근무했다면 무리 없이 탄탄대로를 걸었을 테지만 이런 여유는 꿈도 못꿨을 거라며 경제적으로는 조금 덜 풍요로울지라도 지금 상황이 너무 행복하다는 말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됐다. 인종차별, 이방인으로 사는 불편함, 속 시원히 의사표현을 할 수 없는 언어의 장벽 등 많은 어려움에도 호주에서의 생활에 행복감을 느낀다며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도전해보라는 말을 들으니 두려움과 불안함에 눌려 저 밑에 깔려있던 용기가 조금은 고개를 내미는 느낌이었다. 약 1시간 동안 까맣게 물든 멜버른 고속도로 위에서 소리를 낮춰 작게 나눈 대화는 호주 여행이 남긴 가장 인상적인 기억이다.
가이드님은 여러모로 나와 공통점이 많았다. 대학에서 불어불문학을 전공했고 국내 대학 서열을 나눌 때 서로 이름을 나란히 하는 학교를 졸업했으며 졸업 후 바로 안정성이 높은 직장에서 꽤 긴 시간 꾸준히 근무했다. 보통 이런경우, 살면서 만나게 되는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사회가 정해둔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 인생의 큰 굴곡 없이 편안하게 걸어갈 수 있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경험함으로써 검증이 된 길이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님도 아마 혼자 톡 튀는 별난 사람 취급을 받았을 것이라 조심스럽게 생각해본다.
그냥저냥 사는 게 다 그렇지 적당히 만족하고 사는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내가 속한 이 조직이, 조금 더 나아가 이 사회가 지옥같다고 느낀다. 더할 나위 없이 안온하지만 동시에 이루말할 수 없는 답답함이 있다.
공무원을 그만두면 내가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해 여러 구인구직 사이트를 뒤져본 기억이 있다. 나의 관심을 끄는 공고들의 지원조건은 대체로 '초대졸 이상'이었다. 그렇게 공무원은 하기 싫다면서 그런 회사들에는 선뜻 지원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럴듯하게 적힌 회사의 연혁도, 해봐야 알겠지만 당장은 흥미로워 보이는 직무 내용도 전부 눈길을 끌었지만 굳이 가진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도전할 만 한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그렇다. 학창시절 내내 우등생이었고 좋은 대학에 입학해 말단이지만 공무원 시험에 단기 합격했다. 대단한 이력은 아닐지라도 평균 이상의 노력이 들어가는 과정이었으므로 사회를 계단으로 본다면 나는 평균보다는 조금이라도 윗 칸의 계단을 밟고 서있어야 한다고 은연중에 항상 생각해 왔다. 알량한 자존심과 약간의 억울함이 내가 내다볼 수 있는 거리의 범위를 정해놨고 그 안에서 아무리 나의 적성을 찾으려 해봤자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을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한국사회를 벗어나서 해쳐나가야할 것 투성이인 낯선 '정글'에 맨몸으로 덜렁 떨어져보려는 마음을 먹은 것이다. 그냥 한국에서 안전하게 다른 길을 준비해 볼 생각은 없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내가 어떤 로망이나 기대감을 품고 막연한 행복을 좇아 떠난다고 생각하는 지 너무 온실속의 화초로 커서 뭘 모른다는 뉘앙스가 묻어나는 말도 자주 들었다. 이왕 그만두는거 하고 싶은거라도 해야지 또 안전지대에 발을 걸쳐둔 채로 닿을 수 있는 반경안에서만 고민하면 내 인생이 과연 달라질 수가 있을까? 또한, 이미 가기로 마음먹은 상황에서 내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나쁜 일을 늘어놓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파랑새를 찾아 떠나는 것은 아니다. 밖에 아무리 강한 해가 떠있어도 정글 속 울창한 밀림에 서있는 내게는 한줄기 볕조차 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이 불쑥 찾아오기도 할 것이다. 내 삶이기에 최악의 상황을 못해도 수천번은 상상해보았다. 나는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 실패담을 먼저 찾아보고 영양제를 사먹어도 부작용부터 확인하며 인간관계에서도 모두가 나를 싫어한다는 가정하에 시작하는 사람이다. 복잡한 머릿속을 겉으로 내보낼 땐 그저 "내가 망할지도 모르지만," 정도로 표현할 뿐이다.
생존에 급급해 하루살이처럼 살지, 어느정도 잘 적응해 나의 인생을 돌아볼 시간이 될지는 모르겠다. 이왕이면 후자인 편이 좋겠지만 전자라고 해도 지금으로서는 지옥으로 느껴지는 이 안온한 삶에 대한 감사함이 생길테니 의미있다. 내가 정한 정글 입성까지의 기간은 앞으로 약 8개월, 하루살이만은 면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준비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