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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를 나눈 친구

50여년 의지와 협력으로 성장한 형제

by 꿈꾸는 철이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태어나 처음 부모를 만나고, 이어 형제를 만난다. 그 후 학교, 직장, 동호회 등에서 다양한 인연을 맺는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든 편안하고 서로를 이해해주는 관계는 많은 시간이 쌓여야 비로소 만들어진다. 나에게 그런 소중한 관계이자 가장 친한 친구는 누구일까? 바로 형이다.


우리 형제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다. 1970~80년대, 농촌에서 자란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늘 함께였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초등학교 다닐 때 새벽 이슬을 밟으며 뽕잎 한 포대씩을 따놓고 학교에 갔다. 중학교 때는 방학마다 소가 먹을 깔을 베러 다녔다. 형이 지게를 지고 내가 낫을 들고 들판을 누비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집에 경운기가 생긴 뒤에는 지게 대신 경운기를 몰며 함께 일했다. 그렇게 우리는 노동 속에서, 그리고 놀이 속에서 끈끈한 유대를 쌓았다.


고등학교 때까지 용돈이란 개념은 우리 형제에게 낯설었다. 아버지는 다섯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할머니와 어렵게 사셨다고 했다. 그 때문인지 아버지 주머니에 들어간 돈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교통비나 병원비 같은 꼭 필요한 돈조차 아버지께 말씀드리기 어려웠다. 그 당시 우리 형제는 아버지가 너무 인색하다고 투덜대곤 했지만, 그런 어려움 속에서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서로 소곤대며 형제애로 똘똘 뭉쳐 지냈다.


군대 제대 후, 나는 금융자격증을 따기 위해 학원에 다니고 싶었다. 학원비는 30만 원 정도였는데, 1995년 첫 월급이 40만 원이었던 시절, 이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아버지께 학원비를 말씀드릴 자신이 없어 형에게 상의했다. 형은 망설임 없이 학원비 전액을 내주었다. 그 돈을 받으며 형의 믿음과 희생에 가슴이 뭉클했다. 몇 년 전 그 일이 떠올라 고마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형과 형수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며 그때의 감정을 나눴다. 형은 웃으며 “내가 그렇게 했었나....”라며 말했지만, 그 돈은 단순한 금액 이상의 의미였다.


형은 30여 년간 공무원으로 일하며 법령과 규정을 중시했다. 불의를 보면 그냥 넘기지 못하는 성격 탓에, 업무 과정에서 편법을 쓰거나 계약과 다르게 일하려는 사람들과 마찰을 빚을 때도 있었다. 한번은 부당한 요청을 단호히 거절하며 원칙을 지킨 일로 상사와 큰 갈등을 겪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내가 해결 방안을 이야기 해 주지는 못했지만, 끝까지 들어 주고 지지했다. 그때마다 형은 나름의 위안을 얻는듯 했다. 나는 형의 청렴한 공직 생활을 늘 응원했고, 그런 형이 자랑스럽다고 말하곤 했다.


몇년 전에 형이 말했다. “네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야.” 그 말은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나 역시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기 어려운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형에게 나눠왔다. 형은 언제나 묵묵히 들어주며 나를 이해해줬다. 50년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희노애락을 함께 나누며 피로 맺어진 친구로 성장했다. 앞으로도 이 소중한 형제애를 이어가며 서로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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