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는 사랑과 민초들의 삶
소설 토지를 몇 달간 몰입하여 읽었다. A형 독감으로 5일간 읽지 못한 날을 제외하고, 매일 틈틈이 책을 펼쳤다. 휴일에는 아침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빠져들며 읽었다. 흥미로운 전체 스토리도 매력적이었지만, 각 인물의 삶에 깊이 공감하며 그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꼈다. 특히 월선과 조병수의 이야기는 지금도 짙은 여운으로 남아 있다.
토지는 1897년부터 1945년까지, 개화기에서 일제강점기, 해방에 이르는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제국주의 열강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이익을 다투던 시기, 세계적으로는 두 차례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이야기는 경남 하동군 평사리에서 시작되어 진주, 통영, 부산, 서울, 그리고 하얼빈과 일본까지 동아시아 전역으로 확장된다. 이 방대한 무대에서 펼쳐지는 인물들의 삶은 시대의 격랑 속에서 생생히 살아 숨 쉰다.
토지에는 최서희, 김길상 등 60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최서희와 김길상은 1권부터 21권까지 서사를 이끄는 중심축이지만, 이들을 단독 주인공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각 인물의 생애가 세밀하고 일관되게 그려져, 그들의 삶에 이입하며 시대와 상황을 함께 겪는 듯한 몰입감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기억에 남는 인물만 떠올려봐도 최서희(강인한 여성), 김길상(그녀의 동반자), 윤씨 부인(가문의 중심), 최치수(비극적 인물), 월선(헌신적 어머니상), 조병수(고난 극복의 상징) 등 20여 명이 생생하다. 그중에서도 월선과 조병수는 특별한 감정을 남겼다.
월선의 이야기는 내 가슴을 가장 깊이 울렸다. 무당의 딸로 태어나 유부남 용이와 사랑으로 맺어진 그녀는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자식을 낳지 못했음에도 용이의 아들 홍이를 친자식 이상으로 사랑하며 키웠다. 과로와 병으로 쇠약해진 월선은 만주에서 죽음을 맞이하며, 마지막까지 홍이와 용이를 걱정했다. 그녀의 장례 장면은 어머니의 희생적 사랑을 떠올리게 하며, 내 눈물을 하염없이 흐르게 했다. 월선의 삶은 나의 어머니와 이 땅의 수많은 어머니들이 보여준 헌신과 희생을 대변한다.
조병수는 악행으로 점철된 조준구의 아들로, 꼽추라는 신체적 장애와 부모의 학대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여러 번 삶을 포기하려 했으나, 결국 소목장(小木匠)으로 자립하여 일가를 이루고 제자를 양성했다. 노년에 중풍으로 병든 아버지 조준구가 찾아왔을 때, 그의 악행을 묵묵히 견디며 장례까지 치렀다. 조병수는 신체적 한계와 고난 속에서도 겸손과 내면의 성숙을 추구하며 선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삶은 경제적 불안과 사회적 갈등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현대의 청년과 중년, 그리고 때로는 나 자신의 모습이 보여진다.
토지의 시대적 배경은 오늘날과 묘하게 닮았다. 19세기 말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은 오늘날 글로벌 패권 다툼으로, 당시의 사회적 갈등은 현대의 경제적 어려움과 국민 간 분열로 이어진다. 월선의 헌신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에게, 조병수의 고난 극복은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공감을 준다. 조병수처럼 좌절하지 않고 삶을 일구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란다.
토지의 모든 인물은 각자의 삶으로 존중받을 만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25년간 이 대작을 완성한 박경리 작가의 노고와 필력에 경의를 표한다. 월선과 조병수의 여운을 되새기기 위해, 올 해 중 하동 평사리를 방문해 그들의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