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로 타고 강릉에서 포항까지
7월 말, 강릉역 앞 카페에 앉아 있다. 창밖으로 역과 그 앞의 조형물이 눈에 들어온다. 강렬한 태양이 광장을 뜨겁게 달구고, 사람들은 그늘을 찾아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전봇대에 걸린 현수막이 바람에 펄럭이고, 노란 양산을 든 여성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기차 출발까지 40분 전이다. 3주 전, 포항행 13시 50분 누리로 표를 예매하며 해안이 보이는 좌석을 고심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20여 일 전인데도 바다 풍경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리는 몇 자리 없었다.
기차 여행은 내게 늘 낭만이다. 금년 1월부터 매주 인천과 대구를 오가며 4시간 이상을 기차 안에서 보내지만, 피로 대신 여유를 느낀다. 금년 초, 강릉에서 부산까지 동해안 철로가 이어졌다는 기사를 보고 가슴이 뛰었다. 7개월 만에 그 설렘을 실현하는 여행이다. 중앙선, 태백선, 경전선도 언젠가 타 볼 생각이다. 더 나아가, 퇴직 전엔 베트남의 통일열차를, 후엔 러시아의 트랜스-시베리아 철도와 미국의 캘리포니아 제퍼를 타고 싶다.
기차 여행은 짧은 시간에 세상의 다양한 얼굴을 보여준다. 창문에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채워주고, 차 안에서는 낯선 이들과의 순간을 선물한다.
출발 25분 전, 플랫폼에 섰다. 기차는 이미 정차 중이지만 문은 닫혀 있다. 후끈한 공기에 대합실로 돌아와 기다렸다. 12분 전, 탑승 안내 방송이 나왔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기타 선율과 함께 고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코레일과 함께하는 문화철도스테이지 청년아티스트’ 공연 준비 소리이다. 기타와 건반 조율 소리가 역을 채운다. 한 곡이라도 듣고 싶었지만, 출발 4분 전으로, 아쉬움을 뒤로하고 플랫폼으로 향했다.
3호차에 올랐다. 누리호는 밝고 깨끗하며, 좌석 간 거리가 KTX보다 넉넉해 편안했다. 정시에 출발한 기차는 강릉역을 벗어나자 곧 농경지를 펼쳐 보였다. 8분 만에 동해의 청록빛 물결이 눈앞에 다가왔다. 속도를 줄인 기차 옆으로, 해녀들이 파도 사이에서 손을 흔든다. 그들의 미소가 정겹다. 터널을 지나며 창밖이 어두워질 때마다 기차 안도 살짝 고요해진다. 터널을 빠져나오자 정동진역이다. 레일바이크가 해안선을 따라 달리고, 파라솔 아래에는 사람들이 햇빛을 피해 모여 있다. 소나무숲과 긴 모래사장이 어우러진 해변이 눈을 사로잡는다.
망상해수욕장이 스친다. 대진항의 민가와 방파제 너머로 엷은 파도가 부서진다. 묵호역에 다가가자 어촌의 짭짤한 바다 내음이 느껴지는 듯하다. 아담한 모래사장의 파라솔과 사람들이 여름휴가철의 활기를 보여준다. 동해역에 닿았다. 플랫폼엔 승객들이 북적인다. 옆자리는 아직 비어 있어 가방을 정리하며 자리를 비웠다. 혹시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찾아올지도 모른다.
1시간쯤 지났을까, 졸음이 밀려온다. 눈을 감으면 잠이 달아나고, 뜨면 다시 스르르 온다. 삼척역에 닿았다. 멀리 해안 마을과 아파트가 보인다. 근덕역,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역사 위로 태극기가 바람에 춤추고, 그 너머 짙푸른 동해가 배경처럼 펼쳐진다. 기찻길 아래 같은 방향으로 7번 국도가 보인다. 7년 전 국도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옥원역을 지나 홍부역에 도착했다. 여기부터는 경북 땅이다. 울진역에선 고층아파트와 전통 어촌이 묘한 조화를 이룬다. 승객 몇이 오르내리고, 기차는 왕피천을 건너 매화역으로 향한다. 매화, 꽃 이름은 익숙하지만, 지명으로는 낯선 곳이다.
산과 산 사이, 다랭이 논이 펼쳐진다. 기성역에 다가가자 넓은 논 사이로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강릉의 강문해변보다 더 투명한 물빛에 눈이 맑아진다. 기성역에서 마주 오는 기차를 기다리며 3분 정차했다. 단선 구간의 여유로운 리듬이다. 후포역에 닿았다. 30년 전 동생 면회로 왔던 기억이 아련하다. 건축물 너머 바다가 병풍처럼 펼쳐지고, 집들은 한가롭게 흩여져 있다. 고래불역에선 바둑판같은 논과 소나무숲, 그리고 풍력터빈 세 개가 낮은 구릉 위에서 돌아간다. 풍경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다.
영해역, 영덕역을 지나며 포항이 가까워진다. 영덕의 대게 간판이 눈에 띈다. 장사역 근처, 초등학교와 옹기종기 모인 집들이 정겹다. 월포역에선 하늘과 들판, 바다와 집이 어우러진 풍경에 카메라를 꺼냈다. 한 승객이 “이 장면은 놓칠 수 없다”며 웃는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포항역 도착 10분 전이다. 짐을 정리하며 창밖을 바라본다. 3시간 30여 분의 여정이 짧게 느껴진다. 내일, 포항에서 강릉으로 돌아가며 또 다른 풍경을 담을 생각에 벌써 가슴이 설렌다. 여기는 나의 동해안 기차여행 종착지 포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