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바람과 백담사, 그리고 추억
가을이 깊어가는 지난주, 탐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사라, 소피아와 나는 함께 백담사로 향했다. 속초의 많은 비를 뚫고 미시령을 넘자, 빗줄기가 가늘어지더니 백담사 산자락에 다다르니 아예 그쳤다. 설악산의 공기는 이미 단풍의 선혈처럼 붉고 선연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산 정상 위에 구름 한 덩이가 앉아 있었지만, 하늘은 투명하게 맑아졌다. 그곳은 일상의 소음이 스며들지 않는, 마음이 조용히 숨을 고르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입구에서 셔틀버스를 탔다. 7킬로미터의 구불구불한 산길을 오르는 버스 안에서 보이는 차창 밖 풍경은 물에 젖은 파스텔화처럼 은은했다. 붉고 노란 단풍이 산허리를 겹겹이 덮었고, 계곡 물소리가 바람에 실려 귓가에 자연의 선율로 찾아들었다. 그 소리 속에서 나는 도시의 빠른 맥박과 다른, 느린 호흡의 세상을 느꼈다. 백담사는 생각보다 작고 고요했다. 단아한 기와지붕이 작은 궁궐처럼 서 있었지만, 그 고요함이야말로 '깊이'의 본질임을 직감했다.
햇살이 단풍잎을 뚫고 스며들어 반짝이는 가운데, 바람에 살짝 스치는 솔향이 코를 통해 온몸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고즈넉한 사찰안을 천천히 걸으며 사진을 찍었다. 소피아가 카메라 앞에서 웃었다. "아 너무 좋다." 그녀의 목소리는 따뜻한 리듬을 품고 있었다. 사라는 사찰 담장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탐은 배낭에서 준비해 온 간식 오레오를 꺼내 놓았다. 우리보다 빨리 일어나서 간식을 준비한 탐의 배려심에 우리는 입을 모아 감사했다. 산속 사찰에서 먹는 오레오는 입안에서 녹았다. 셀카로 우리들 모두의 모습을 몇 장 찍었다. 나는 카메라로 붉은 잎과 산, 물, 하늘을 담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우리 네 사람의 그림자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사찰을 둘러본 뒤, 우리는 걸어서 내려가기로 했다. 낙엽 쌓인 길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 소리가 발아래서 피어올랐다. 그 소리는 묘하게 안아주는 듯, 따뜻한 속삭임 같았다. 우리는 풍경을 보고 걸으며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가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 침묵은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의 호흡이 스며드는 시간이었다.
한참 내리막을 걷던 중, 나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울긋불긋한 단풍 사이로 맑은 하늘 위에 흰 구름 한 줄기가 흘러갔다. 그 순간,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천천히 그 구절을 읊었다. 소피아, 탐, 사라가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누구도 더 말을 잇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 우리는 같은 별을 바라보는 듯했다. 일상의 번잡함 속에서 잊힌, 작은 빛 하나.
걸어서 내려오는 데는 한 시간 반쯤 걸렸다. 다리가 무거워질 법도 했지만, 산의 맑은 공기와 바람의 속삭임, 그리고 함께하는 대화가 걸음을 가볍게 했다. 길 끝, 셔틀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버스로 올라갔던 백담사 길을 걸어서 내려온 것이다. 걷는 동안 눈이 맑아지고, 얼굴이 밝아졌으며, 마음은 가벼워지고, 몸은 깨끗해진 기분이다. 걸어서 내려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 우리는 별을 세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속에 별이 피어났다. 함께 웃은 순간들, 바람에 흩날린 단풍잎,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감싸던 가을의 부드러운 빛 등이다. 가을은 그렇게 우리를 잠시 시인으로 만들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속삭여주었다. 그 속삭임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별은, 마음속에 조용히 빛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