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 추석이 다가오던 나날에 위염에 걸렸다.
인터넷에서 권고되는 커피의 위험성에도 나는 꿋꿋이 그것을 마셨다. 양배추즙 한 포를 뜯어 마시고, 커피를 마셨고, 밥이 죽이 되도록 잘근잘근 씹어 먹고도 커피를 마셨다. 문득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기특함에 탄복하며 마시게 되었고, 그러고는 슬그머니 위에 좋다는 약들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끝까지 커피를 고수하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커피만은 마셔야만 했다. 그런데 위장은 나와 견해가 달랐다. 쿡쿡 쑤셔대는 아픔을 토해내며 커피를 몰아세웠고, 결국 나는 그것을 포기했다.
커피가 없는 '27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한시도 커피를 잊을 수가 없었고, 결핍은 끊임없이 갈망을 부추겼다. 오직 ‘커피를 다시 마셔야 한다’는 일념으로 위장병을 이겨냈다.
2022년 11월 5일. 다시 커피를 누릴 수 있었다. 커피라이프를 온전히 즐기게 된 건 그로부터 이주가 지난 토요일부터였고, 고생 끝에 만끽한 나의 애호는 달고 산뜻했다.
나는 커피중독자였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떼어내려고 들면 도리어 엉겨 붙는 불가분의 관계 같았고, 커피가 유발하는 건강상의 문제보다 심리적인 이점이 더 컸다. 나는 하는 수 없이 괜찮은 중독자가 되기로 했다.
커피로 인하여 빠져나가는 칼슘을 보충하기 위하여 우유 한 잔을 마셨고, 잠자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게 오후 두 시 이전에 커피타임을 가졌다 - 커피가 어떤 문제의 원흉으로 지목되는 일이 더 없어야 했다.
무엇보다 제대로 고르고 볶은 스페셜티 원두를 구입했다. 상태가 좋지 않은 원두가 문제들을 일으킨다고 어디선가 보았기 때문이다.
나는 날마다 밀폐 용기에 밴 원두의 향을 깊이 들이마시며 커피를 내려 마셨다. 외출을 하거나 별다른 사건이 있지 않는 한은 반복된 일이었으니, 리추얼에 가깝다.
방금 전에도, ‘원두 밀도가 높아 일부 그라인더에서 분쇄가 어려울 수 있다’는 생경한 안내가 쓰인 원두를 액체로 치환하여 들이켰다. 무난한 첫 모금 뒤로 다채로운 향미가 뒤따랐다. 굳이 여타의 음식으로 비유하면 평양냉면과 비슷한 데가 있는, 여운을 부르는 맛이다.
작년에는 원두의 산미를 ‘도레미파솔라시도' 음계로 구체화시킨 어느 브랜드 창의력에 빠져있었으니, 커피의 세계는 한도 끝도 없이 새롭다. (다른 데에 무게를 두면) 특정 커피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가 낮은 고객이기는 하지만, 비슷한 듯 색다른 면모가 핸드드립 커피의 매력인 탓에 어쩔 도리가 없다.
커피라는 것, 눈앞에 공기를 껴안겠다는 여유로운 태도로 음미하면 어느 한순간도 같지 않게 다가온다. 검은색 뒤로 수만 가지 색채를 품는다. 간혹 '어제'를 떼어다 붙인듯한 감흥 없는 '오늘'을 마주하는 법을 커피가 일깨워주나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아무튼 그것이 무얼 의미하던지 간에, 커피가 없는 인생은 어쩐지 가혹하다.
가령 어떠한 연유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좀비로 변하더라도, 나는 짐자무쉬의 영화 <데드 돈다이>에 나오는 커피좀비를 상상하게 된다.
...인간의 살과 내장대신에 검은 액이 생동감 있게 들끓는 커피포트를 탐한다. 두터운 머그잔에 커피액을 쏟아붓고는 죽음에서 돌아온 일에 축배를 든다. 폐허가 된 세상의 어느 카페에서 커피 향을 풍겨나면 커피정키들이 몰려든다. 나는 커피를 마시는 한 새로운 무엇이 펼쳐진다는 법칙대로 난생처음 보는 생명체들과 사랑에 빠진다. 우리는 절뚝절뚝 텅 빈 쇼핑몰을 배회하고, 해괴망측한 표정으로 기념사진을 남기기도 한다. 그리고 잠에 들기 직전에 왕창 커피를 퍼붓는다(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좀비는 카페인에도 숙면을 취한다). 아침볕이 먼지가 그득한 카페 안을 휘저으면 우리들은 느슨히 모닝커피로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아, 커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