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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ythingbut Jan 05. 2024

적재적소

뒤숭숭한 삼일이었다.


어떤 이의 어떤 죽음으로 어떤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애써 부인하려고 해도, 어떤 상처는 어떤 흔적을 두뇌에 남기는지 나는 단숨에 미처 대답하지 못해 온 질문에 닿았다. 새로운 해를 며칠 앞둔 어느 밤에 그렇게 되어버렸다. 살아야 하는 이유를 물었다. 이르게 세상을 떠난 친구에게 무언가 말해주고 싶었던 건지, 요동치는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싶은 건지는 몰라도 나는 그 질문의 한가운데로 냉큼 들어서버렸다. 이내 나는 여전히 그것에 대하여 명쾌하고 유쾌하게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운 빠지는 일이었다. 


다 잊고 잠이나 자면 좋으련만, 이르게 깨버렸다. 가만히 누워서 이를 악물고 연말의 날들을 휴일답게 보내기로 다짐했다. 하지만 샤워기 물줄기 속에서 난데없는 슬퍼지고 말았다. 모른 척 옷을 골랐다. 오버사이즈 코트 밖으로 초록색 치맛자락과 검고 둥근 구두코가 보이도록 입었다.


어떻게든 '즐겁게' 보낼 작정이었다.


맑은 돼지 육수 안에 가느다란 면발을 담고 그 위로 아주 촘촘히 썬 대파를 올려주는 라면집에서 위장을 따듯하게 데워주고는 평소에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러 갔다. 춥지 않은 곳을 배회하며 돈 쓸 궁리를 했다. 이곳저곳에 진열된 예쁜 것들도 보고, 새롭게 입점한 와인 코너도 한 바퀴 돌았다. 먹기만 해도 방전된 에너지가 차오르는 고칼로리 초콜릿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하지만 무얼 해도 그저 그랬다. 기분은 물에 흠뻑 젖은 옷가지처럼 더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끔찍한 일이었다. 이제 해볼 만한 일은 단 하나였다. 매운 음식, 그것이 필요했다. (아마) 이마저 신통치 않다면 나는 오늘 또다시 멈추지 않는 질문에 시달릴 터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통했다. 시뻘건 소스가 고루 발라진 치킨을 물어뜯는 순간 나는 모든 걸 잊었다. 군말 없이 뼈를 발랐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저 맵다는 감각에 모든 걸 맡겨버렸다. 뇌로 파고든 아픔은 혼을 쏙 빼놓았고, 그날 밤 나는 군말 없는 잠을 잤다. 






다음 날 아침에는 경양식 레스토랑을 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공중으로 거슬러 오르는 물줄기가 이내 부드럽게 아래로 하강하는 분수가 있는 고전적인 곳이다.


앉으려다 보니, 소파 좌석의 엉덩이 부분이 푹 꺼져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돈가스를 먹었던 모양이다. 나도 그 엉덩이들 중 하나가 되어서 냉큼 소파에 무게를 실었다. 


돈가스를 먹자고 하니 시큰둥 마지못해 따라나선 남편이었지만, 막상 문을 열고 들어오니 누구보다 열심히이다. 들뜬 얼굴로 샐러드바를 오가며 수프도, 밑반찬도, 탄산음료도 나른다.


서둘러 주문벨을 누른 탓인지, 이내 돈가스 두 접시가 눈앞에 놓인다. 갓 튀겨진 커다란 것 위로 딱히 어떤 모양이라고 말할 수 없는 갈색 소스가 뿌려졌고, 그것 위로는 삶은 당근과 브로콜리와 마요네즈에 버무려진 마카로니가 나란히 놓였다. 작고 귀여운 사이즈의 것들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돈가스 접시에 놓인 마카로니만큼은 좋아했다. 먹을 때마다 알맞게 놓인 알맞은 맛이라는 생각을 반복하게 된다. 


그러고는 남편의 이야기를 기다렸다. 


들은 적 있는 이야기다. 대략, 어릴 적에 나이프를 들고서 무언가를 먹는 장소에 가보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아서 집에서 혼자 계란프라이를 해서 나이프를 들었다고 했다. 어릴 적 남편은 여러모로 힘들었고, 그러한 연유로 (여전히) 돈가스랑 꽤 어울렸다. 나는 그 조합이 싫지만은 않아서 전처럼 다음 어린이날에도 돈가스를 사주겠다며 약속을 해주었다.




둘러보니 다들 상기되어 보였다. 큼지막한 돈가스에 모두의 유년시절이 묻어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슬픔이든 기쁨이든지 간에.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오래되고 낡은 분수의 물줄기가 유유히 흘렀다. 맑고 투명한 소리였다. 그것은 낡은 체크무늬 정장을 차려입은 노신사가 바이올린을 연주를 해도 어울릴 법한 소리였다.  


나는 냉큼 들리지 않는 무형의 음악을 머금은 공기를 집어삼켰다. 


꿀꺽 뱃속 가득 채워 넣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그저 길게 늘어선 줄 사이로 번호표를 뽑아 들고, 문을 열자마자 서둘러 자리를 잡고 주문벨을 누르고, 부지런히 먹기를 했을 뿐인데, 돈가스 옆의 마카로니처럼 곁을 떠나지 않는 '삶(life)'의 단순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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