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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ythingbut Feb 28. 2024

편지를 쓰는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단 한 장의 편지를 쓸 수 있다면, 나는 데이비스에게 긴 호흡으로 나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DAVIS라는 영문자를 여박의 상단에 붙박여 두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온기를 잃은 글자들이 그의 시각을 통해 무언가로 되살아날 것만 같았다.  


본격적으로 편지를 쓰기에 앞서, 데이비스를 간략히 소개한다면 그는 영화 <데몰리션>에서 제이크 질레한이 연기한 인물이다. 실제로는 없어도 한 명즈음은 지구상에 있기를 절로 바라게 되는 인물인 셈이다. 


그의 차별점은 막무가내로 편지를 쓰는 데 있었다. 그는 타인에게 무작정 자신을 털어놓아 버린다. 솔직하거나 진솔하기보다는 절박함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다. 살다 보면 말도 안 되는 것들에 사로잡히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었고, 데이비스가 그러하였다. 하지만 그의 무작위한 글쓰기는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동요하였고, 혈관이 드러날 정도의 것을 써 내려가고 싶어졌다. 


이제, 그(the) 데이비스처럼 편지를 쓴다. 







DEAR DAVIS.


문제는 자판기였습니다. 동전을 무려 다섯 개나 넣었는데 노란색 봉투가 스프링에 걸리며 스낵이 나오지 않았죠. 당황스러운 일이었죠.


그래도 당신은 침착하게 그 일을 기억해 두었다가 편지를 쓰게 되죠. 기계의 오작동으로 피해를 입은 소비자로서 해당 회사에 환불을 요청하는 건 타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글은 점차 아내의 이야기로 흘러가더군요. 주머니의 소지품을 하나둘 꺼내어 몸을 가볍게 하는 양 아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일관되게 유지된 정갈한 필체로 딱히 어떠한 감정도 드러내지 않더군요.  


사사로운 정보가 가득한 편지를 쓴다는 게 당신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당신은 또다시 펜을 잡더군요. 같은 필체로 아내가 죽었는데도 속상하지 않았다고도, 사람들의 짐가방을 뒤지고 싶다고도, 경비원이 들고 있는 총을 빼앗고 싶었고도 쓰더군요. 


자판기회사의 고객센터에서 답이 온 것은 당신의 손에서 물이 새던 냉장고가 완전히 분해되었을 즈음이었습니다. 정성껏 쓴 당신의 편지에 비하면 성의가 없는 전화 한 통이었지만, 당신은 통화를 나눈 캐런을 찾아갑니다. 그녀에게는 답장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하였지만, 반드시 무언가 해야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더군요. 


아마도 그때였을까요.


위장에서 어떤 신호가 감지되었습니다. 슬리퍼를 신고 나가서 알새우칩 한 봉지를 사고 싶어 졌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편지가 쓰고 싶어지기도 했습니다. 남의 호주머니를 낱낱이 뒤지는 식으로 속사정을 꺼내어 보이고 싶더군요. 묘한 안도감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말하고 싶다는 욕구처럼 살아 있다는 증거가 되는 일도 없으니까요. 아무튼 인생 전반을 뒤흔들 만큼의 것이 수면 위로 드러나도 별 수 없다는 데까지 생각이 이르더군요.

하지만 막상 그것들을 쓸 수가 없었답니다. 한참을 고민해도 적당한 수신자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연실색할 얼굴들만 낯설게 서성거렸죠. 저는 그제야, 엉뚱하게도 자판기 회사에 장문의 편지를 쓴 당신을 이해하게 되었죠. 그래요. 저를 안다고 여기는(믿는) 타인에게 혼란스러울 말들을 꺼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랍니다. 그냥 그렇습니다. 


결국은 당신의 이름을 붙잡았습니다. 당신이라면, 가볍지만 무거운 편지에 마음을 내어줄 것만 같았습니다. 봉투 안에 든 글자들을 대수롭지 않은 일을 다루듯 진지하게 읽어 내려갈 테죠. 


데이비스, 지금부터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름 아닌 핸드폰입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화가 나면 종종 핸드폰을 던져버린답니다. 음악 듣기도, 영화 보기도, 문자 보내기도, 검색하기도, 결제하기도, 쇼핑하기도, 게임하기도 가능한 그것의 숨은 기능은 던지기입니다. 화가 날 때 순간적으로 가장 멀리 나가는 물체랍니다.


아직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저는 아무리 사정의 여의치 않아도 푹신한 데를 찾아 핸드폰을 던진답니다. 행여라도 오른팔이 멍청하게 조준에 실패하면 곧장 달려가 액정부터 살피죠. 우습게도, 금이 가지 않는 액정의 기적에 화가 누르러진 적도 있답니다 - 한심하게도, 아마 핸드폰 액정이 깨지는 것보다 더 화가 나는 일은 없는 모양입니다. 


당연히 물체를 부수거나 훼손한다고 하여서 감정이 해소되지는 않겠죠(그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그런지, 생각이 깊어지는 날이면 저는 저를 알아차리기도 한답니다. 서투른 감정들을 양받아준 상대가 부재한 채로 자라 버린 서글픈 어른이 눈앞에 어른거리더군요. 


제대로 화도 내지 못하는 딱한 사람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애먼 소파만 찾더군요. 집안 거실을 차지한 소파만큼은 푹신함과 특유의 인내로 저를 받아주었기 때문이죠. 아둔한 샌드백이 되어서 누군가의 마음을 지탱하여 준다는 것은 몹시 고마운 일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니 소파의 쿠션도 다 꺼져버리고, 저는 다시 혼자가 되었답니다. 표출되지 못한 감정들이 안으로만 파고들었죠. 그것들은 한 겨울의 폭설처럼 두텁게 마음을 짓누르며 무너질 일만 남았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저는 어쩔 수 없이 꽁꽁 얼어붙는 묘책을 구해냅니다. 그렇게 몇 해를 살다 보니 마치 눈얼음이 저 인양 익숙해지더군요. 무언가를 바꾸려 들어도, 그마저도 녹아버리면 감당하지 못할 무언가가 드러날까 봐서 두려웠답니다. 


대단한 결심이라기보다는 하는 수 없이 저는 마음을 풀어 해지기로 하였답니다(2022년 2월 23일). 보이지 않는 마음은 시시때때로 저를 위태롭게 하며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양손으로 얼음의 벽을 어루만지니, 발끝까지 냉기가 퍼지며 북극과 남극의 새하얀 겨울밤이 펼쳐졌습니다. 슬금슬금 녹아버린 미움 뒤로 사랑이 감지되기도, 슬금슬금 녹아버린 사랑 뒤로 불안이 감지되기도 했습니다. 반쯤은 녹아내린 불안 뒤에는 무언가를 무서워하는 생명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시간이 두 해정도나 흘렀지만, 아쉽게도 마음은 온전히 융해되어 호수를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그저 지켜보는 것 말고는 무엇 허용되지 않는, 북쪽지방의 물가 같았죠. 실망스럽기도 했지만, 어떤 것이 어렴풋 이해되더군요. 마음을 지닌 존재는 마음에서 자유로울 없다는 것을요. 때때로 그저 사랑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걸요. 저는 당신에게 그것을 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데이비스, 지난주엔 난데없는 한파가 들이닥쳤습니다. 


강원도로 여행을 가보니 눈이 큰 산 여럿을 뒤덮었더군요. 산보다 더 큰 눈이었습니다. 하지만 티브이를 켜니, 곧 봄비가 내릴 거라고 합니다. 


얼어붙었던 땅으로 촉촉이 물기가 스미며 생을 응원하면, 매해 그렇듯 올해도 눈싹 같은 목련이 피어오르겠죠. 곁으로 바짝 다가온 계절이 빠르게 스치려 하면 꽃을 사러 가야겠습니다. 투명한 유리병에 물을 담아 색이 있는 튤립 몇 송이를 꽂아두고서 다소 탐욕스러운 어투로 아름답다고 말하며, 봄의 곁에 머물러야겠습니다. 행여 난데없이 오한이 찾아와 또다시 글로 쓸만한 슬픔과 절망이 찾아드는 날에 다시 편지를 쓰겠습니다. 정갈한 필체로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겠습니다. 


그럼, 그때까지 안녕히.



FROM MY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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