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과 방학'은 '여름과 방학'만큼이나 어울린다. 오르고 내리는 기온의 변화에도 끄떡없는 성능을 자랑하는 기계가 아니라면, 인간답게 쉼을 선언하는 것은 퍽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성공에 대한 들끓는 열망도 없는데, 쓸데없이 얽매이게 되는 만 시간의 법칙이나 성실이라는 내적 강요는 잠시 내려놓은 채로 대부분의 활동을 멈추어 보기로 한다.
인생의 유익한 것들을 보통 허구의 스토리에서 배운 탓에 비교적 최근에 본 일드 <나기의 휴식>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영화나 드라마를 즐겨보는 탓에 나는 그러한 것에 관하여 무궁무진하게 떠들어 댈 수 있지만, 스포일러 때문에 종종 망설여진다. 게다가 감상을 망치는 정보의 기준이라는 것이 사람마다 다른 듯하여서, 적당한 선을 요령 있게 짚어내기 어렵다.
나의 경우를 돌아보면, 주인공이 아닌 주변인의 시점으로도 이야기를 감상하기도 하여서,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나 영상도 곧잘 본다. 또, 제법 많은 양의 (보아야겠다고 마음먹은) 영화를 제때에 감상하는 편이라서 부아가 치밀 정동의 엄청나게 괘씸한 스포일러를 경험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감상법이 존재하므로, 뭔가를 강요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간에 <나기의 휴식>을 볼 작정이라면 앞으로 진행될 세문단은 건너뛰는 게 좋다.
이제 다시 이야기덕후로 돌아가 즐겁게 떠들어 본다.
내가 애정하는 '쿠로키 하루'가 연기한 나기라는 인물은 눈치 보는 일에 능하다. 공기의 흐름마저 읽어내며 매 상황에 맞추어 자신을 연출한다. 겉으로 친화적인 인물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는 일들이 허다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기가 쓰러진다. 그렇지만 누구도 나기를 걱정하지 않는다. 바로 그날, 나기의 휴식이 시작된다.
나기는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휴식기를 보낸다. 신경을 쓰지 않아 엉망으로 복슬거리는 곱슬머리를 휘날리면, 방안을 누빈다. 드라마답게 빠르게 진행되기는 하지만, 나기의 심리적 독립은 쉽지가 않다. 타인이 아닌 자신에게 만족스러운 게 무엇인지 알기조차 힘들다. 여차저차 드라마는 엔딩을 맞이하고 나기는 세탁방을 열겠다고 다짐한다.
드라마를 보고는 새삼 휴식이라는 단어에 오묘하게 어울려드는 세탁방을 기억해 냈다.
미국에 살 적에 자주 가던 장소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 세탁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건물의 구조상 세탁기를 설치할만한 배수 시설이 없었다. 오래된 건물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편의상의 이유로 건물을 부수고 새롭게 짓지 않는 듯했다. 실제로 그러한 일들이 가능하다는 걸 나도 미국에 살며 알게 되었다.
그 결과 거리의 모퉁이마다 세탁방들이 즐비했다. 한국의 편의점만큼이나 많았다. 그래도 일주일치의 세탁물을 들고서 엘리베이터 역시 없는 건물을 오르내리는 일은 꽤나 번거롭고 귀찮았다. 아주 미미하고 희끄무레했던 '빨래'가 일주일마다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리추얼이 되어버린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보다 금세 그 반복에 적응했다. 심지어는 한국으로 돌아가 길을 걷다가 우연히 코끝에 걸려든 세탁세제의 향에 뒤를 돌아보기까지 했다.
코끝에서 시작된 다우니의 향은 나의 발끝을 멈춰 세웠다. 마음이 세탁방에 머물던 시간으로 돌아가 온순해졌다.
새하얀 거품이 빙글빙글 회전하는 사십오 분, 보송보송 온기가 채워지는 건조기의 육십 분 동안, 반강제로 취했던 휴식의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나는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대단한 무언가를 한 적이 없었다. 커피를 마시기도 했고, 멍을 때리기도 했고, 간단한 걸 아침으로 먹기도 했다. 주변을 걷기도 했다. 그러고는 옷가지와 함께 빨래되는 운동화들을 보며 남의 집 세탁 사정을 속으로만 한심해하기도 했다. 하지만, 건조기에서 온기를 머금은 옷가지들을 꺼대어 자루에 쓸어 담을 때면,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일주일 치의 묵은 땀과 냄새를 씻어낸 건 빨래만이 아니었다. 나도 분명 무언가를 게워냈다.
그 뒤로는 이상하게도 쉰다는 바람 속의 한 장면에는 야자수와 노을빛 바다와 세탁방이 연달아 이어졌다.
지난 2주간, 나는 무단으로 작은 세탁방에 침거한 사람처럼 쉬었다 - 한 주만 작정한 일이 조금 더 길어졌다.
하루살이처럼 내키는 대로 잠을 자고, 밥을 먹었다. 미루고 있던 집안 정돈을 끝내기도 했다. 영화를 보러 가기도 했고, 원데이 클래스를 가기도 했다. 서점에도 갔다. 때마침 하는 아시안 컵을 보기도 했다. 밤을 새워서 극장골을 짜릿함을 맛보았다. 사우디와 호주 전 까지는 아드레날린이 과하게 분비되었으나, 요르단전에서 뜻밖의 현실을 목도했다. 일명 스마일게이트,...
그 외에는 커피를 잘 마신 나날들이었다. 설에는 우즈베키스탄 음식을 먹었다.
남편가 함께 간 동대문 근처의 중앙아시아길은 새로운 세상이었다. 과연 한국말로 의사표현을 하는 게 옳은 걸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외국인이 많았다. 한껏 수그러든 말투로 솜사를 주문했다. 솜사는 고기나 야채를 넣은 빵을 화덕에 구운 것이다. 한마디로 진정한 군만두였다. 본분에 충실한 우직한 맛이었다. 본질을 잃지 않은 군만두는 나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았다. 뱃속에서 이국의 향신료의 뒷맛이 피어올랐다.
때마침 이번 명절에는 시어머님이 끓여주시는 떡만두굿을 먹지 않았다. 드디어 절에서 합동차례라는 것을 지낸 덕분에 노동에서 해방된 첫 명절이기도 했다. 나의 위장은 한 껏 들떠서 새로움을 받아들였다.
익숙함을 벗어나도 정말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