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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동순 Dec 14. 2022

[수줍은 사찰 산책] 수줍은 첫발

'아난'과 '여시아문'

  수줍습니다.

  불심이 뭔지도 모르고, 불교에 대한 지식도 어줍잖습니다. 어릴 적엔 교회 다녔습니다. 그 당시 저에게 절은 무섭고 낯설고 목사님 말씀으로는 ‘하나님 곁에 둘 수 없는 다른 신’의 장소였지요. 그마저 ‘모태신앙’에서 ‘못해신앙’으로 돌아선 지 오래되었습니다.


  시작은 이렇습니다. 올해 초부터 적을 두고 있는 공부공동체에서 초기 힌두교와 불교 경전을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눴습니다. 이쪽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딱히 할 게 없었고 버리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에 가벼운 마음으로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재밌는 구석이 많았습니다. 저에게 경전이란 글이 없는 시기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기에 그 시간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가장 강렬하고 담백하며 분명한 댓구’의 향연이었습니다. 결국 무지한 중생들에게 깨달음 한 가지를 알리고 이해시키기 위해 무지막지한 분량으로  ‘바리에이션’을 쳐대는 세상 가장 거대한 ‘캠페인’으로도 보였습니다. 무엇보다, 경전에는 수많은 캐릭터들 또한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중 유독 제 눈에 띈 캐릭터가 한 분 있었습니다. 바로, ‘아난’입니다.


  ‘아난’은 붓다의 ‘인간 녹음기’였습니다. 언제나 붓다 옆에 바싹 붙어, 붓다의 말을 가장 가까이에서 듣고, 그 말씀을 중생들에게 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불경을 읽다 보면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문장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혹은 ‘이와 같이 나에게 들렸다.’라고 풀어 말할 수 있습니다.
  문득, 제 아이가 처음 말이 트였을 때가 생각납니다. 요상한 욕심이 생겼습니다. 아이가 처음 뱉는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한동안 아이 곁에서 늘 귀를 쫑긋 세우고 살았습니다. 처음엔 ‘으빠빠’, ‘꺄끝’ 같은 이해할 수 없는 단어를 주로 뱉었지만, 말이 조금 늘었을 때는 꽤 재치 있는 말도 곧잘 했습니다. 예를 들면, 세 살 즈음엔 엄마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아빠는 뚱뚱한 게 아니야. 모기 물려서 부은 거야.” 물파스를 열심히 발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이런 얘기도 했습니다. 퇴근길에 주전부리를 사들고 온 제가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책상 위에 검은비닐 봐봐. 거기에 선물 있어.” 그러자 대뜸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빠가 선물이지~, 아빠가 선물이야~” 간만에 워드파일에 담아 놓은 아이의 옛 말들을 꺼내보니 기분이 묘해집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말에 귀를 기울인 시간이 참 아름다웠구나’ 싶었습니다. 어쩌면, 아이에 귀 기울인 시간이 곧 ‘내가 자라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기록이 있기에 언제든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아난'의 시간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붓다의 가장 가까이에서 토씨 하나 안 틀리기 위해 늘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그 옛날 스님 한 분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어쩌면 그 시간이 자신도 모르게 붓다와 닮아가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상상해봅니다. 아난과 동료들이 수고하며 기록해준 덕에 수천 년이 지난 지금 이 순간에도 붓다의 지혜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음에 새삼 감사한 마음 또한 일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문장으로만 만날 수 있는 그 ‘아난’이란 사람의 얼굴이 궁금해졌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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