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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야 Jun 26. 2019

첫 눈에 반하는 일은 없었다.

소개팅 날 블루투스 스피커를 들고온 이상한 남자

지치고 지쳐 너덜해져버린 마지막 연애가 끝나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던 때가 있었다. 꽃꽂이 클래스부터 스피닝과 헬스까지 모든 여가 시간과 돈은 나만을 위해 쓰였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사계절이 지났고 그마저도 지겨워질 때쯤 나는 그를 처음 만났다.


여느 하루처럼 회사를 출근한 날이었다. 화장실에서 잠시 손을 씻고 있는데, 직장 선배를 마주쳤다. 그리곤 갑자기 나에게 소개팅을 제안했다. 살짝 당황스럽긴 했지만 "선배님이 소개해주시면 저야 그냥 하죠"라고 웃으며 넘겼다. 사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다. 그런데 자리에 돌아오니 바로 메신저 알람이 울렸다.


'연락처 줄테니 연락올거야~'

'네?'


선배의 추진력은 가히 대단했다. 사실 그에 대해 들은 것도 몇가지 없었다. 우리 동네에 산다는 것, 사진 찍는 것이 취미라는 것, 착한 성격의 회사원이라는 것. 그 뿐이었다. 아 참, 마지막으로 잘생겼다고 했다. 분명 그랬다.그렇게 일사천리로 나의 소개팅은 성사되었다. 심지어 그의 나이도 모른 채 말이다. 선배에게 소개팅 제안을 받은 그 날 그에게 연락이 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 금요일 동네에서 간단히 맥주를 마시기로 약속을 잡았다.


소개팅 당일이 되었다.

만나기로 한 술집 건물 앞을 서성이다 메시지를 보냈다.


"도착하셨어요?"

"네."

"근데 제가 얼굴을 몰라서 그런데 전화 한 번만 주실래요?"


주변을 둘러보며 전화를 거는 사람이 있나 살펴보았다.

바로 찾았다. 핸드폰을 얼굴에 대곤 나를 보며 다가오는 저 사람.


'뭐지, 잘 생겼다고 했는데...'

순간 아쉬워하는 나를 발견했다.


분명 나 자신은 그리 외모지상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선배의 잘생겼다는 말을 너무 찰떡같이 믿은 나머지 기대를 해버린 모양이었다.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우선 술을 마시러 이자카야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사실 외모를 제외하고도 첫 인상이 그리 좋지 않았다. 자리를 잡고 앉기 전까지 느껴진 그의 인상은 뭔가 껄렁껄렁한 말투에 가벼운 느낌이었다. 요즘 날씨는 어떻고, 지하철엔 사람이 많고 뭐 이런 시덥지않은 이야기밖에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일단 어둑한 이자카야에 그와 마주앉아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런데 요즘 일이 힘들었던 탓일까 술이 한 잔 두 잔 들어가니 이런 저런 사는 얘기가 술술 나왔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가 별 소릴 다했다 싶을 정도로. 요즘 내가 하는 생각과 고민들. 보통 취미가 무엇이냐 물어보던 그런 소개팅들과는 달랐다. 그 시간은 그랬다. 이상하게도 그와 나는 얘기를 하면 할수록 대화가 잘 통했다. 맘에 들지 않았던 첫 인상 따위는 기억나지 않았다. 두시간 만에 그렇게 되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보니 시간은 벌써 열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사실 그 당시 나는 열시면 집에 도착해서 널브러져 있던 때였다. 열시를 넘어 집에 가는 것이 한 달에 한 번 있을까말까한 그런 정도의 일이었다.(얼마나 잉여인간이었던 거냐) 그는 2차로 내가 사는 동네에 연어육회집을 가자고 제안했다. 열시가 넘은 시각이라 조금 망설여졌지만 그 날만큼은 더 놀고 싶었다. 이 남자와의 대화를 여기서 마치기엔 조금 아쉬웠다. 그래서 택시를 타고 자리를 옮겼다. 그 날은 8월 18일, 야외에서 소맥을 즐기기에 아주 적합한 날씨였다. 해가 떨어진 늦여름날, 한껏 푸릇한 나뭇잎들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스쳐가는 그런 날이었다. 마침 가게의 야외 테이블에도 자리가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2차 수다는 연어를 먹으며 시작되었다.

그리고 대화가 무르익을 때쯤 그는 갑자기 이상한 말을 했다.


"친구들이 미친X이라고 했는데, 제가 뭘 가지고 왔어요. 평소에 항상 들고다니거든요."

 

검은 색 투박한 블루투스 스피커를 가방에서 꺼내는 그를 보며 빵- 웃음이 터졌다. 그리곤 그는 나에게 자기의 재생목록을 들려주었다. 더 재밌었던 것은 흘러나오는 노래들이었다. 생각나는 대표적인 노래는 에픽하이의 우산이었는데, 고등학생 당시 나의 최애 노래였다. 소울메이트 OST도 흘러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곡들이 무수히도 쏟아져나왔다. 그 순간 나는 진지하게 '이 남자랑 결혼할 것 같다'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나를 두고 사람들은 말도 안된다며 웃어대겠지. 하지만 그 웃긴 일은 현실이 되었다.


그는 이제 내 남편이니까.




나에게 첫 눈에 반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첫 날에 결혼할 남자임을 직감하는 일은 일어났다.

그것은 현실이 되었고 더이상 웃기지 않은 일이 되었다.

 

첫 만남의 그 날, 우린 새벽 한 시까지 그 가게에서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 그는 나를 우리 집에 바래다주고 헤어졌다. 늦은 밤 잠에 들며 생각했다. '내일 일어나면 친구들에게 바로 얘기해야지! 나 이 남자랑 결혼할 것 같다고' 이 이야기는 이제 우리 집안 식구들이 모두 아는 얘기가 되었다. 내 남편은 물론이거니와 시댁과 회사 동료들까지 말이다. (떠벌떠벌)


운명이란 걸 믿어본 적 없는 나지만 결혼을 통해 옛날 선조들의 지혜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짚신도 짝이 있다더니 말이다.


내 결혼은 아마도 미친X 소리를 듣고도 블루투스 스피커를 챙겨온 나의 남편의 선견지명 덕분이 아니었을까 한다. 고마운 내 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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