뱃속 아기를 잃었다.
지난 열흘이 참 길었다.
이건 아이가 잘못됐다는 걸 알게 된 날부터, 오늘까지의 기록.
훗날 다시 읽어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직은 짐작도 못하겠다만..
2016, 4. 28.
원래 정해진 1차 기형아 검사는 내일이었지만, 하루 앞당겨 오늘 병원에 가기로 했다.
딱히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는데, 어쩐지 하루라도 빨리 아가를 봐야 할 것 같은 기분에
미리 진료 날짜를 옮겨뒀던 참이었다.
정밀 초음파 검사는 평일, 6시 전에 와야 볼 수 있기 때문에 오늘은 남편도 없이 혼자 병원을 찾아갔다.
버스 창가에 앉아 따뜻한 봄볕을 맞아가며 했던 상상이란, 뱃속 아기가 아들일까 딸일까.
벌써 12주에 들어선 참이라, 잘하면 성별을 눈치챌 수도 있다는 얘기에 괜히 가슴이 설렜다.
느낌엔 아들이었지만, 딸이라도 마냥 좋았다.
병원 접수대에서 오늘부터 정밀 초음파를 볼 것이며, 기형아 검사, 피검사가 같이 이뤄질 거라는 설명을 듣고,
대기석에 앉아 병원에서 내내 틀어놓는 '감격의 출산 장면'을 또 봤다.
오늘로써 한 6번쯤 보는 장면인데도, 괜히 코끝이 찡하고 가슴이 뭉클했다.
나도 우리 아기를 만나는 날엔 화면 속 엄마들처럼 저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겠지.
10분 남짓, 진료를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는
10달간 아기를 품고, 낳아, 안고 있는 장면이 빠르게 상영됐다.
이윽고 내 이름을 호명하는데, 원래 드나들던 원장님 진료실이 아닌 입체 초음파실로 나를 안내했다.
초음파 보시는 선생님은 따로 계시는듯했는데, 상냥하고 친절한 여자 선생님이었다.
배에 젤을 바르고 스틱형의 초음파 기계로 배를 꾹 눌러 이리저리 움직였는데,
선생님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상하단다.
아기가 너무 작아서 아직 보이지 않으니, 오늘까지는 질 초음파를 보셔야 할 것 같다고...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기가 잘못됐으리라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못했다.
나중에, 몇 번이고 그때 그 장면을 떠올려 봤는데, 초음파 선생님이 다시 책상에 가 앉으며 언뜻 지어 보였던
표정엔 분명, 난처함이 묻어있었다.
원장 선생님은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12주씩이나 됐는데 애가 작다니 무슨 소리냐는 반응이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초음파를 보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으로 계속 깜빡대는 아기 심장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고,
엉덩이부터 머리까지의 길이를 재보니 불과 3센티 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20일 전, 아기의 키가 2.7센티였으니 0.3 센 밖에 자라지 않은 셈인데. 이런 계산이 스고 보니.. 분명 유산이었다.
평소 같으면 "여기 깜빡거리는 심장 보이죠? 애기가 잘 놀고 있네요, 심장 박동도 좋습니다" 같은 말을 해주시던 원장 선생님도 오늘은 말이 없었다.
결국 무거운 침묵을 깨고 '계류유산'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7일 내로 수술해야 한다는 설명과 함께...
귀가 먹먹했고. 그동안 원장님을 마주하며 바라봤던 서재의 책장이 울렁거렸다.
'미안합니다'
아주 짧은 찰나지만, 그 정신에도 원장 선생님이 짧게 뱉은 '미안합니다'란 말이 가슴에 맺혔다.
고마웠다.
선생님이 마지막으로 건네준 아기 사진을 들여다보니, 앙증맞게 움직이던 젤리 곰이 뒤집어져
둥둥 뜬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네가 죽었구나.
의연한 척 수납을 마친 뒤, 병원 밖으로 나와 오열했다.
사람들의 시선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괜한 의미부여 일지 몰라도 그 전날 어쩐지 잠이 안 와 집안 서재를 뒤적거리다,
벌써 2번은 읽은,
박완서 작가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또 읽었다.
작가님이 하나뿐인 아들을 잃고 그 먹먹한 심정을 일기로 적은 글인데, 나는 이 책만큼 슬픈 책을 아직 못 봤다.
그 책을 빼 들면서 순간적으로, 내가 혹시 우리 아기를 잃으면, 이 책의 내용이 얼마나 가슴 아프게 와 닿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분명.
그리고 후회했다.
내가 어제 그 책을 괜히 읽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테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상관관계를 떠올리고 부정했다.
무조건 집으로 들어가 마음 놓고 울고 싶었는데, 집 앞에서 외출하고 돌아오시던 시어머니를 만났다.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시곤, 병원 갔다 왔냐고 물으시는데.
나는 애기가 잘못됐다는 말만 겨우겨우 남기고 황급히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는 쓰러지듯 침대에 엎어져 울었다.
아기가 언제 잘못됐을까? 나는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내가 웃으면서 저녁을 먹던 그 날이었나? 화보 촬영 때문에 밖에서 벌벌 떨던 그 날이었나?
12주 차에 발견했지만, 크기로 봐서는 9주 후반쯤이었기 때문에, 나는 대략 그 쯤으로 시기를 특정했는데
나중에 원장 선생님 말씀은,
아기가 잘못된 뒤 크기가 줄어들기 때문에 언제라고 콕 집어 얘기할 수 없다고 하셨다.
아무것도 모르고 우리 세 식구의 행복한 앞날을 감히 확신하던 그때
불과 3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던 우리 아기는 살려고 애써보다 결국 심장이 멈췄었구나..
오른쪽 머리가 얼얼하도록 울고 있을 때
헐레벌떡 퇴근한 남편이 들어와 나를 안아줬다.
"오빠랑 나 사이에 아직도 우리 아기가 있는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나한테 오빠가 그랬다.
마지막 초음파 봤을 때 아기가 팔을 흔들더라며 좋아했는데,
그게 엄마 아빠한테 보내는 마지막 인사였지 싶다고.
그 말에 둑 터진 댐처럼 눈물이 더 쏟아졌다.
물 외에 다른 '먹을 것'은 생각도 하기 싫었는데
수술받으려면 무조건 잘 먹어야 한다며 어머님이 구운 소고기와 밥을 내려보내셨다.
억지로 밥을 조금 먹었는데, 입안에 쌀이 들어오자마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설움이 북받쳐 올라왔다.
내가 밥을 먹다니. 불과 점심까지만 해도 아기를 생각해서 잘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지금부터 내 몸에 들어오는 영양분은 오로지 나를 위한 것이구나.
아직 내 몸에 남아있는 고니한테 미안해서라도 밥을 더 먹을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소파에서 잠든 오빠를 굳이 침대로 데려오지 않았다.
우린 서로가 괜찮아지길 기다리며 따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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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29
7시쯤 눈을 떴다 다시 잠이 들었다.
깨어있고 싶지 않은 마음.
오늘 오후, 수술을 하기로 결정했으나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8시 좀 넘어 출근하는 남편은 나를 꼭 끌어안고 현관을 나섰다.
아직 시보라 연차를 내지 못하는 남편은, 내가 회복실에 있을 때쯤이나 얼굴을 볼 수 있을 듯싶다.
회사를 나가서 뒷정리를 하고 올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관뒀다.
담담하고 건조하게... 편집장님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는데
아기가 잘못됐다고 말하다가 결국 또 오열했다.
지금은 아이가 셋이지만, 결혼 초반 역시나 유산을 경험했다던 편집장님은 다 알겠다는 목소리였다.
그 뒤로 내리 잠을 잤다.
다시 깬 시간은 오전 11시.
하룻밤 사이에 10년은 늙어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던 나는,
위층 시댁에 올라가 거의 국물뿐인, 누룽지 약간을 먹고 다시 집으로 내려와
아기와 관련된 모든 물건을 정리했다.
몇 번이고 입을 맞췄던 초음파 사진들, 3개나 되는 임신테스트기, 생애 첫 임산부 수첩.
아무렇게나 내버려 뒀던 그것들을 정리해 서재방 깊숙이 옮기는 동안
내가 세 번을 울었던가. 네 번을 울었던가.
샤워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고, 시어머니와 만나 병원에 가기 전까지.
나는 내 임신을 함께 기뻐해 줬던 가족,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수술하게 됐음을 얘기했다.
다들 놀랐고, 위로했고, 곧 좋은 소식이 또 올 거라는 말을 해줬다.
오후에 어머니와 같이 산부인과로 향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임산부 신분으로, 좋다고 드나들던 곳인데 오늘은 아이를 보내주러 왔구나.
서러워서 또 눈물이 났다.
접수를 마치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배부른 임산부들을 몇이나 봤는지 모르겠다.
저 정도면 30주는 됐겠구나,.....
부럽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하고, 나에게 다시 또 저런 날이 올까 막막하기도 한.. 여러 감정이 일었다.
말없이 앉아있는데 뒤에서 만삭의 임산부가 남편인지 친정엄마인지에게 전화를 걸어
아이가 잘 크고 있으며, 오늘 초음파를 보니 아무래도 아기가 자기를 좀 더 닮은 것 같더라는 말을
희망에 부풀어하고 있었다.
내내 잡지를 보고 있던 어머님이 이거 보라며 화제를 돌려주신다.
나와 같은 예민함으로, 임산부의 말을 듣고 계셨던 어머님의 배려겠거니...
다시 뵌 원장 선생님은, 정말 수술하러 온 거냐고 물었다.
너무 빨리 결정을 한 게 아닐까. 지금이라도 혹시 모르니 초음파를 한 번 더 봐달라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으나
어제 봤던 불쌍한 아기의 모습을 또다시 확인할 용기는 또 없었다.
가자마자 수술을 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자궁경부를 유연하게 하는 약을 투입한 뒤 2시간이 지나
수술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어머님과 다시 집으로 돌아와 누워있는데 그새 오빠가 퇴근을 하고 들어왔다.
무척 반가웠다.
하루 종일 남편을 기다렸나 보다.
약을 투여했으니, 앞으로 생리통 정도의 통증이 있을 거랬다.
아니나 다를까, 배가 알싸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참을만한 정도의 통증이었는데 갑자기 뱃속이 꼬르륵하다 뭔가 확 쏟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더니 투명한 액체가 쏟아져 나와 있었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그게 양수라는 건 직감으로도 알 수 있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그리고 이어지는 새빨간 출혈.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주 가까운 거리였으나 걸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오빠가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을 좋아하는 나는, 임신을 하고도 매번 운전을 했기 때문에,
조수석엔 처음 앉아 보는데 또 괜한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 그 장거리 운전은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때 갑자기 튀어나온 차 때문에 내가 놀랬던 적이 있는데...
부질없는 짓인 줄 알면서도 생각은 그칠 줄 몰랐다.
수술실로 올라가 자궁유착방지제인지, 영양제인지를 한 병 맞았다.
그리고 수술실로 걸어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침대에 작은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아래 스테인리스 통 같은 게 하나 부착돼 있었다.
위치도 딱 양 허벅지 사이이니..
보나 마나 긁어낸 부속을 담아두는 통이 분명했다.
내 소중한 아기가 의료폐기물이 되어 버려지다니..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다.
곧 의식을 마비시키는 마취제가 들어왔고 나는 잠이 들었다.
수술은 금방 끝난 모양이었다.
휠체어를 타고 회복실로 옮겨져 또 링거를 맞았다.
극심한 생리통 정도의 통증이 생겨, 진통제를 놔줄 수 있냐고 물었더니,
이미 주사를 놓은 상태니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고 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어머니와 오빠에게 의지해 주차장으로 갔다.
마취 부작용 때문인지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머리가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았다.
자궁내막의 용종 때문에 차병원에서 소파수술을 받은 경험이 있는데
그때도 꼭 이런 증상이 나타나 남들보다 회복실에서 오래 머물렀던 기억이 있다.
그때 간호사가 내 손을 꼭 잡아주면서, 마취 부작용을 겪는 분들이 있다고 설명해줬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런 줄 알았다. 다행히 증상은 오래가지 않아서 집에 도착할 때쯤엔 괜찮아졌다.
침대에 누워 안정을 되찾는 동안
어머님이 미역국과 흰쌀밥, 과일을 잔뜩 차려다 놓고 가셨다.
순간, 내가 건강한 아이를 낳고 막 들어온 상황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은 생각에 또 우울해졌다.
오빠랑 마주 앉아 미역국을 먹다가 배를 만져보고 또 엉엉 울었는데,
그새 많이 극복한 건지, 아니면 극복한 척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오빠는 미역국만 잘 먹는다.
그래도 어제에 비해 한결 나아진 기분으로 잠이 들 수 있었다.
진통제 때문인지 크게 아픈 것도 잘 모르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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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4. 30
아침을 먹고 어머님, 오빠랑 같이 집을 나섰다.
어머님은 가깝게 지내는 한의사로부터 자궁 문제를 전문으로 보신다는 한의사 한 분을 추천받아두신 모양이었다.
그렇게 찾아간 곳이 송파동이었는데,
공교롭게도 한의원은 내가 초등학교 때 잠깐 살았던 아파트 단지 안에 있었다.
아빠가 서울로 발령을 받는 바람에 이사 온 아파트였는데
그때는 반도아파트, 지금은 래미안으로 바뀌어 있었다. 하기야 세월이 벌써 22년 전이니...
매일 아침 등교하던 골목, 상가를 다시 만나고 보니 반갑기도 하고, 묘하기도 했다.
토요일인데도 한의원엔 손님이 꽤 많았다.
기다리는 동안 어머님, 오빠랑 나란히 앉아 해피투게더를 봤는데, 피식피식 웃음이 난다.
어제까지만 해도 다 죽어가던 내가 웃고 있다니.. 이렇게 사람이 또 살려나보다.
깡마른 체구에 목소리가 카랑카랑하던 한의사 선생님은, 내 검사 결과지를 보고 무척 놀랐다고 했다.
진료받기 전에, 신체 상태를 보는 간단한 검사를 실시했는데 모든 결과가 다 최악으로 나왔다는 거다.
우울감 높음, 호르몬 불균형 등...
지금은 잘 기억도 안나는 검사 항목이었지만, 모든 색깔이 다 검게 나왔다.
그냥 하는 소리겠거니.. 넘겨버릴 수가 없었던 건 같은 검사를 받은 오빠는 모든 결과가 정상이었기 때문.
특히 스트레스 지수가 너무 높다고 했는데,
내 몸 곳곳을 만져보던 한의사 선생님은 이 정도면 거의 요양을 요하는 수준이라고 했다.
남편과의 관계, 시댁과의 관계, 친정의 문제 하나하나 문제가 없는지 물었지만,
내 생각에도 나는 복 터졌다 싶을 정도로 모든 관계가 원만했다.
그렇다면 딱 하나 직장에서 받는 스트레스라는데, 그 정도야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받는 정도가 아닐까?
선생님은 유독 스트레스에 둔감한 사람이 있는데 내가 그런 타입일 거라고 했다.
언젠가 회사에서 실시한 한 심리검사에서 내가 너무 사소한데 신경을 쓰고,
지나치게 의연한 척하는 게 문제라는 식의 결과가 나온 적이 있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처음으로 직장을 그만둬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마흔전까지만, 이 일을 해야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 있긴 했지만, 나는 대체로 내 직업을 사랑하는 편이었다.
회사 책상에 앉아 꼬물거리며 자료를 찾는 것도 좋았고,
무엇보다 일 핑계로 여러 곳, 여러 사람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이 보다 더 좋을 수 없는 동료들과 선, 후배는 또 어떻고.
마음이 쿵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내 자궁에 근종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한약을 신중하게 써야 한다던 선생님은
일단 어혈을 풀고, 원기 회복을 돕는 쪽으로 약을 지어주시겠다고 했다.
남편 역시 함께 몸을 만드는 게 좋겠다는 판단에 따라 오빠 것도 약을 지었는데
두 사람 몫을 짓고 보니 약값이 엄청 나와서 어머님께 죄송했다.
돌아오는 길,
어머님은 원래 엄마, 아빠에게 폭 안기는 아기가 있다며,
너희랑 자식으로 엮일 인연이 따로 있을 거라는 말로 우릴 위로하셨다.
품에 폭, 안기는 아기라니..
그 말이 퍽 인상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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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5.1
수술이 잘 되었는지 확인하러 오빠랑 병원에 갔다.
일요일 진료를 보는 병원이라, 마감 때도 출근하기 전 잠깐씩 들러 아기를 보곤 했었는데.
문득 얼마 안 된 그 일이 엄청 옛날 일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옷을 갈아입고 진료실로 들어서려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보호자가 같이 들어갈 건지를 물어보신다.
매번 당연하다는 듯 따라 들어오던 오빠가 오늘은 대기석에 앉아 있겠다고 했다.
잠깐 섭섭해 지려다가, 오히려 내 편에서도 그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은 수술을 잘 됐으며, 일주일 뒤 다시 초음파를 보러 오라고 하셨다.
엉덩이에 항생제를 한 대 맞았더니 뻐근해서 내내 엉덩이를 문지르며 집에 왔는데
오빠는 평일에 야근을 안 하려면, 주말 근무를 좀 해야 한다며 회사로 갔다.
유산으로 법정 휴가가 생긴 나는 공휴일 포함 10일간 집에서 쉬기로 했는데,
남편은 하루 종일 집에 있을 마누라를 생각해 나름 수를 쓰는 모양이었다.
집에 돌아와 대학 동기한테 전화를 했다.
수술한 줄 몰랐던 동기는 화들짝 놀라며 나를 위로했는데
그녀 역시, 요즘 결혼문제로 속 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지라,
도대체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생기느냐며 훌쩍거렸다.
복합적인 감정이었겠지만, 내 일로 울어줬다는 생각에 고마웠다.
전화를 끊고 어머님과 마주 앉아 둘이 밥을 먹는데,
어머님이 "이틀밖에 안 됐는데 금요일 일이 아주 오래된 얘기 같다"라고 하셨다.
아닌 게 아니라 나 역시 금요일 일이 아주 아득하게 느껴졌다.
문득 이것 역시 방어 기제의 작동이 아닐까 생각했다.
너무 힘들어서 견디기 어려울까 봐,
아주 먼 옛날 얘기 같은 기분이 들게끔, 그래서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지게끔.
몸이 그런 신통방통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미처 챙겨 먹지 못한 오빠는 쫄쫄 굶은 채로 일을 마치고 들어와
어머님이 차려주신 닭볶음탕과 갈치조림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사람들이 시댁과 위아래층으로 살면 힘들지 않냐는 말을 넌지시 건네 오는데,
만일, 이럴 때 기댈 구석이 없었다면 내가 힘든 몸으로 밥을 해주던가,
오빠가 배달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며 지내던가.
둘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오빠는 요리를 1도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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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2
남편을 출근시켜 놓고 내내 누워있다 조금씩 움직여 집을 치웠다.
오후에 절친이 오기로 되어 있는데, 아무리 아프다지만, 난장판인 집으로 친구를 들이는 건 내키지 않았다.
오후 2시쯤 친구가 과일을 잔뜩 사들고 집으로 놀러 왔고, 나는 오랜만에 유쾌한 기분으로 수다를 떨었다.
아이가 어떻게 잘못됐고, 어떤 수술을 받았고 하는 얘기도 술술 하게 됐는데 눈물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아주 오래전 어떤 영화에서 봤던 부분인 것 같은데
상주에게 "어쩌다 (고인이) 돌아가셨냐"는 질문을 인사치레처럼 자꾸 하는 이유가 다 있다고 한다.
사람들의 물음에 어쩔 수 없이 자꾸, 고인의 죽음에 대해 얘기하다 보면,
그 일이 조금은 일상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지게 된다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슬픔을 얘기하며
'아 나에게만 벌어지는 엄청난 비극이 아니구나,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구나'
체념도 하고, 수용도 하며 차차 격해진 감정을 잠재운다는 내용이었는데 정말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다 죽어갈 줄 알았다던 친구는 생각보다 기분이 괜찮아 보인다고 좋아했다.
그 친구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위로를 해줬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비단, 남녀관계나 사회생활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닌 듯싶었다.
외박을 무지무지 싫어하는 친구 남편이지만,
이 날 친구의 외박을 허락해준 덕분에 나는 오랜만에 친구랑 한 침대에서 잠이 들었다.
둘이 편하게 자라며 눈치껏 위층 시댁으로 자리를 피해 준 남편은, 그날 밤 시집간 아가씨 방에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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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3
아침부터 비가 쏟아져 내린다.
친구를 보내 놓고 잠깐 쉬다 보니 금방 대학 동기들이 들이닥친다.
한 명은 공무원 시험 준비 중이고, 다른 한 명은 아기 엄마인데,
내 소식을 듣고 일부러 짬을 내 멀리서 찾아와 줬다.
원래 세심한 성격인 동기 A는, 기분 좋아지라고 보라색 꽃을 준비해왔는데
내 것뿐 아니라 우리 시어머니 것까지 센스 있게 두 다발을 준비해와서 두 사람의 기분을 화사하게 만들어 줬다.
나처럼 계류유산의 아픔을 한 번 겪고 3개월 만에 임신,
지금은 엄청 튼튼한 아들을 낳아 육아전쟁을 치르고 있는 B는 호두과자를 안겨줬다.
팥, 호두는 먹어도 될 것 같아서 사 왔다는데, 그 얘기를 하면서도
녹두는 안 된다 참외 같은 찬 음식 먹지 말아라, 지금은 네 몸 추스르는 게 최고이니 이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움직이지 말아라 같은 밉지 않은 잔소리를 늘어놨다.
B는 앞으로의 임신을 걱정하는 나에게 "소파 수술하고 나면 임신이 잘 된다!
괜히 3개월 안에 애 가져서 몸 망가뜨리지 말고 피임을 잘해야 한다"면서도
"하지만 내 친구는 생리 한 번 없이 임신해서 지금 애 엄마니까 알아서 하라"는 말을 남겼다.
서로 붙어 앉아해도 해도 또 재밌는 대학시절 얘기와, 현재의 고민, 앞으로의 계획을 나누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나 벌써 퇴근시간 즈음.
두 친구 덕분에 하루를 또 금방 보낼 수 있어 좋았는데,
그날 저녁엔 회사 후배가 맛있는 샐러드를 들고 찾아와 줬다.
이날 부득이하게 야근을 해야 했던 남편 때문에, 저녁 시간을 또 혼자 어떻게 보내야 하나 내심 걱정이었는데
후배가 찾아와서 무척 반가웠다.
그간 회사에 별일은 없었는지, 우리 팀에 새로 왔다던 선배는 잘 계시는지.
이 와중에 회사 얘기부터 궁금한 걸 보면, 나도 참 어쩔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맛있게 샐러드를 나눠먹는 동안,
후배는 큰 언니가 계류유산을 두 번이나 겪고 낙심했지만, 결국 건강한 조카를 둘 씩이나 낳아 잘 기르더라는
얘기를 해줬다.
한 사무실에서 4년이나 함께했고, 같이 지낸 밤이 숱하게 많으며,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누구보다도 자주 나눈 후배지만, 처음 듣는 얘기였다.
분명 어렵게 꺼낸 속 얘기였겠지.
하지만, 나에게 분명 큰 위안이었다.
존재만으로 힘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미안하고 염치없는 소리이지만,
나는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유산을 겪은 지인들의 지인들'에게 큰 위안을 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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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4
친정집에서 쉬다 올 요량으로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어머니는 푹 쉬고 오라며 마음 편하게 나를 보내주셨는데,
토요일에 집에 돌아와 보니 난장판이었던 우리 집 옷장이 말끔히 정리돼 있었다.
나중에 전해 들은 얘기지만, 어머니는 내가 친정에 가 있는 동안,
우리 집 옷장을 정리하시느라 진땀을 빼셨다고 한다.
그 수고로움을 감수하시면서도, '며느리가 옷장에 손댔다고 싫어하면 어쩌냐'는 걱정을 하셨다니,
민망함에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여하튼,
친정에 도착해 보니, 오늘, 내일하고 있는 만삭의 동생이 소파에 누워있었다.
엄마한테 약 먹게 얼른 밥을 달랬는데, 임산부가 무슨 약이냐고 되묻는 동생.
곧 아기 낳을 임산부에게 굳이 전할 말은 아닌지라, 엄마가 쉬쉬하고 있던 모양인데,
덕분에 내 입으로 직접 나 유산했다는 말을 또 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충격을 먹은 동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그 아이는 나름의 위로랍시고
아직 얼굴을 못 본 아이이니 그나마 충격이 덜하지 않겠냐며 얼른 털고 다시 가지면 된다는 식의 얘길 했다.
순간 울컥하는 감정이 들어 혼났다.
'얼굴을 못 봤으니 그나마 괜찮다고? 내가 얼마나 슬펐는데.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사람이 원래 겪어본 만큼만 이해하고 산다지만, 아무리 자매지간이라도 남의 아픔을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듯한 태도에 화가 났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었다고 가정해보면, 나 역시 저런류의 멋대가리 없는 위로를 했을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면, 우리 가족이니까.
아름답고, 곱고, 우아한 위로엔 영 소질이 없는 우리 가족은 항상 이런 식이다.
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고3이었던 동생은 '올~~ 주제에"라는 매너 없고 예의 없는,
하지만, 제 딴엔 최고의 칭찬을 했다.
나 역시 그 애를 추켜세워줄 만한 상황에서 쑥스럽다는 핑계로 늘 깎아내리고 폄하하기 바빴다.
위로나 위안이 필요한 상황에서 역시, '여우의 신포도'처럼 그거 별거 아니었는데 차리라 잘됐어.라는 식의
합리화를 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니까 저 애가 지금 '에이 별거 아니네 괜찮아'라는 식의 얘기를 하는 건, 그만큼 충격이 컸다는 의미다.
속뜻을 헤아리고 나니 빨리 뛰던 심장이 진정되고, 그렁그렁 하려던 눈물이 말랐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가족들 앞에서 우는 걸 최고로 수치스러워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잘 울지 않는다.
동생을 따라 다 같이 산부인과에 가기로 했다.
예정일이 이틀이나 지났기 때문에, 혹시 몰라 검진 차원에서 병원에 가겠다던 동생이었다.
그런데, 도착해서 진료를 받고 보니 벌써 자궁문이 6센티나 열려있는 상황이었다.
그때까지 약간의 배당 김, 외에 별다른 통증을 느끼지 못했던 동생은
하마터면 집이나 거리에서 아이를 낳을 뻔했다.
그 길로 당장 분만장으로 직행한 동생은 30분의 진통 끝에 예쁜 딸을 낳았다.
엄마는, 이 정도의 순산이라면 아이를 10명은 낳겠다며 좋아했다.
잠깐 인큐베이터에 들려 나가는 아기를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그 작은 것이 어찌나 똘똘하게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는지, 마음 깊은 곳에서 말로는 다 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들었다.
아까 동생에게 화내지 않아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경솔하게 화내지 않은 내가 기특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딸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딸기란 태명을 붙였다던 우리 딸기는 정말 작고 어여뻤다.
동생이 출산하고, 회복되길 기다리는 동안,
나는 수술실 앞에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보고 있었다.
어린 아들과 함께 아내의 출산을 기다리던 남자.
임신 사실을 모르고 피부과 약을 한 달이나 복용해 결국 친정 엄마의 손에 붙들려 수술을 받으러 온 여자.
(여자의 친정어머니는, 대기실에서 딸의 사연에 대해 털어놨다)
남편에게 기대 눈을 꼭 감고 있는 저 여자는.. 아마도 유산 수술을 받으러 왔겠거니.
여자는 아직 배가 홀쭉했고 얼굴이 창백했는데, 부부가 하나같이 모두 저런 슬픈 표정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뱃속 아기가 잘못된 경우가 분명할 것 같았다. 의연하게 여자의 어깨를 보듬고 있던 남자는 여자를 홀로 수술실에 들여보낸 뒤 계속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자궁근종 때문에, 임신 때문에 산부인과를 수도 없이 들락거렸는데, 나는 왜 한 번도 유산 때문에 병원을 찾은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며, 이제야 저런 사람들이 선명하게 눈에 띄는 걸까.
겪어봐야 안다... 나는, 이제 유산의 아픔을 호소하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위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식을 받고 부랴부랴 병원에 달려온 사돈어른도 만났다.
동생으로부터 내 임신소식을 전해 들은 사돈어른은, 이제 성별 나올 때쯤 되지 않았느냐며,
아들인지 딸인지를 물어오셨다.
담담하게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갑자기 목이 메고, 말문이 턱 막히니 나도 참 난감한 노릇이었다.
말 못 하는 나를 대신해 엄마가 내 손을 꼭 잡고, 애기가 잘못돼서, 회사에 휴가를 낸 상태라고 설명해줬다.
사돈어른은, 아까워서 어쩌냐며 나를 위로하더니,
본인 역시 첫째 딸과 둘째 아들. 그러니까 우리 제부를 낳기 전까지 유산을 4번이나 겪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유 없이 자꾸 아이가 잘못되곤 했는데 한 번은 7개월짜리 아이를 흘려보낸 적도 있다며 사돈어른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계셨다.
이렇게 좋은 날, 나로 인해 아픈 기억을 또 끄집어 내실수밖에 없었던 사돈어른께 죄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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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5
동생이 병원에 있는 동안, 아직 세 살밖에 안 된 조카는 엄마가 맡아 돌봐주기로 했다.
덕분에 집에 있던 나 역시 조카랑 붙어 놀 수밖에 없었는데,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음에도, 그런 것쯤 다 잊어버릴 만큼 조카가 사랑스럽고 예뻤다.
이 날은 녀석을 데리고 놀이터에서 시소도 타고, 그네도 타고, 미끄럼틀도 탔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얀 민들레가 눈에 띄길래 입으로 후~ 불며 씨앗을 날려줬더니 조카가 깔깔 거리며 그렇게 좋아할 수 없었다.
후 불며 멀리멀리 날아가라, 멀리멀리 날아가서 또 싹 틔우고 살아라~ 하다가 문득 훅 울음이 터졌다.
날아가서, 다시 살라는 말에 잘못된 아기가 생각난 까닭이었다.
그 아이는 지금쯤 어디까지 갔을까.
안녕 아가.
아무것도 모르는 조카는 티 없이 맑은 얼굴로...
식상하다만 그 이상의 표현을 찾을 수 없는 천진난만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작은 어깨를 힘줘 꽉 안았더니 발광을 하며 품을 빠져나가 버린다.
저녁엔 오빠가 찾아와 다 같이 외식을 하러 나갔다.
아빠는 원기를 보충할 필요가 있다며 장어집으로 우리를 데리고 갔는데
노력해서 다시 아이를 가지면 된다는 말이 아직은 멀고, 버겁게 느껴진다.
오빠도 비슷한 마음이겠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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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6
식구들 다 같이 산후조리원으로 옮긴 동생을 보러 갔다.
외부인 출입이 엄격히 제한돼있는 모양이었는데,
엄마나 조카까지는 괜찮아도,
언니나 형부는 좀 그렇다는 실장의 말이 거슬린다.
방침인 건 알겠지만, 조리원이라는 장소의 특성 때문인지.....
임신, 아기, 출산.. 이런 유의 영역으로부터 내쳐지는 것 같은 괜한 기분이 들어 속상했다.
이게 바로 피해의식이고. 마음의 병이겠거니.
특별히 아주 잠깐만,
그것도 맨 바깥 응접 의자에 앉아있으라는 호의(?)를 베풀어준 덕분에 잠깐 동생 내외를 볼 수 있었다.
딸기는,
그새 볼 살이 붙고, 오동통해진 것이 처음 태어났던 날과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유리창 너머에 내 주먹만 한 얼굴을 하고 있는 작고 귀엽고 감동적인 신생아들.
나도 언젠간 이런 산후조리원에 올 수 있겠지? 있을까?
마음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다.
제 엄마랑 떨어져 울고불고할 것을 염려했으나, 조카는 다행히 외갓집 식구들 틈에서 잘 어울렸다.
잘 놀던 녀석은 저녁, 잠이 올 때가 되면 갑자기 센티멘탈해지면서 징징 거리곤 했는데,
제 엄마와 가장 비슷한 외모를 하고 있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안아줘' 하며 나에게 곧잘 매달려 안겨있었다.
그 전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만 조카를 안아줬는데,
이제는 조카가 온몸을 나에게 의지해 안길 때마다 말캉한 아픔이 느껴진다.
나는 이게 피려다 만 모성애일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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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7
오늘은 내 서른두 번째 생일이다.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나를 '시어머니가 괜히 네 생일상 차려야 되는 건 아닌가 신경 쓰신다'는 말로
굳이 붙잡아 둔 엄마는,
아침부터 잡채에, 갈비에, 더덕에, 토란국에 떡 벌어진 생일상을 차려놓는다.
시어머니 고생하신다는 핑계로 잡아두긴 했지만, 내가 왜 모르겠는가.
유산한 큰 딸과, 출산한 작은 딸 사이에서 마음 놓고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못한 엄마는
'엄마 밥'으로 이렇게나마 나를 다독이고 싶었을 것이다.
씩씩하게 밥 한 공기를 다 비우고, 나는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수 없이 '엄마 나 간다' 하고 나섰던 친정 현관인데, 오늘은 다시 영영 못 올 곳을 떠나는 서글픈 기분이 든다.
어쩌면 엄마가 위층에서 내려다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나는 눈물을 꼭꼭 참다가 차 시동을 걸고 나서야 마음 놓고 울었다.
며칠 만에 돌아온 집.
나 없는 동안 어머님은 옷방이며 거실을 말끔히 정리해 두셨는데 새로운 마음,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출발하라는 의미에서였다.
고마워서 또 눈물이 펑펑 났다.
이제 그만 울어도 될 것 같은데...
이 와중에 벨이 울려 나가 보니, 친구가 기분 전환하라고 꽃다발을 보내왔다.
사랑과 배려가 가득 담긴 친구의 카드를 읽다 또 울었다.
'이소라의 데이트'를 틀어 놓고 누워 있는데 이번에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선배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연락이 왔다.
이 선배는, 나의 멘토 같은 분인데, 담백하게 안부나 물어보려고 전화를 한 것이 구구절절, 내 지난 일주일을 얘기하게 되고 말았다.
선배는 선배다운 성숙한 말들로 나를 위로해줬고, 통화가 끝나자마자 카톡으로 홍삼 기프트를 보내주셨다.
아침에 커피 대신, 홍삼 마시라면서.
오늘 아침부터,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축하, 위로 연락이 쏟아졌는데.
나는 이런 사소한 연락이 얼마나 큰 위로와 윤활이 되는지 새삼 또 느꼈다.
나의 꽃 같은, 어여쁜 사람들.
퇴근한 남편은, 내 생일 겸, 어버이날 겸. 겸사겸사 근사한 저녁을 쐈다.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식구들은 저녁을 먹으며 나에게 농담도 하고, 덕담도 해줬다.
물을 집어 든 순간, 포크로 스파게티 면발을 말아 올리던 순간.
문득문득,
이 세상에서 친정 부모님 다음으로 나를 사랑하는 분들이 바로 시부모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엄청난 걸 선물 받은 기분이었는데,
시부모님은, '모든 걸 다 잊고 새로운 기분으로 다시 시작하라'는 편지와 함께 넉넉한 용돈을 쥐어주셨다.
나는 복에 겨웠다.
이것만으로도 다시 힘을 내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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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5. 8
어버이날이자, 나의 마지막 휴일.
내일이면, 회사로 복귀해 또 엄청나게 쌓인 일과 싸움, 내지는 타협을 해야 하겠지.
솔직한 심정으로는,
일보다 동료, 상사들의 위로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가 더 걱정이지만.
경과를 보기 위해 찾아간 병원에서는 자궁에 약간의 피고임이 있긴 하지만,
우려할만한 수준은 아니어서 자연스럽게 스며들 거라고 했다.
오전에 잠깐,
욕실 사용 습관 때문에 잠깐 티격태격했던 우리 부부는.
또 금방 풀어져 헤헤거리며 동네 한 바퀴를 하러 나갔다.
남편이 힘내라고 사준 운동화를 맞춰 신고서!
운동화 끈을 바짝 매 주던 남편의 어깨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그래도 다시 걸어 볼 만 하겠다고.
부부가 된 이례,
가장 큰 일을 겪은 우리는,
비로소 아주 약간은, 진짜 부부가 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함께 만드는 추억, 그래서 쌓이는 세월의 내공 같은 건,
꼭 좋은 일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테니까.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나서,
맞아 그때 그랬지,
우리가 그런 격랑을 지나왔지.
그것도 같이 말이야.
어느 날은 감격에 겨워서 어느 날은 탄식하듯 얘기할 날이 올 테지.
이것도 그 많고 무수한 에피소드 중의 하나가 되리라 예상하면서.
이만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