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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혜정 Dec 22. 2021

아이는 어른이 된다, 아이의 기억을 간직한 채.

나도 어릴때가 있었지 말입니다.  맨 오른쪽. 



딸의 나이가 고작해야 5살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나는 요즘 ‘자식의 어려움’을 간간이 실감하고 있다. 자기주장만큼이나 또렷해지는 아이의 기억력이 나를 그렇게 만든다. 딸 아이는 요즘, 예컨대 이런 기억을 들먹이며 나를 머쓱하게 한다. 


“엄마랑 아빠랑 저번에 싸웠잖아. 그래서 방바닥이 이렇게 됐잖아.” 


일년 전 남편과 말다툼을 하다 홧김에 차 열쇠를 집어 던졌다는 게 그만, 마루 바닥에 생채기를 내 놓고 말았는데, 딸은 잊어버릴 만하면 한번씩 바닥을 가리키며 엄마 아빠에게 ‘그때 그 날’을 주지시킨다. 그렇다고 ‘복기’에 어떤 패턴이 있는 것도 아니다. 슬라임을 가지고 놀며 깔깔거리다 한 번, 목욕 하고 나와서 머리를 말리다 말고 한 번, 자려고 누웠다가 한 번 그렇게 맥락 없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아이의 한 마디에 ‘다시는 애들 보는데 싸우지 말아야지’ 가슴에 손을 얹고 다짐하게 된다. 


그때,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엄마 아빠는 개구쟁이야”하던 딸은 겨우 고작 4살이었지만, 제 딴엔 어떻게든 이 심각한 상황을 모면해보려고 농담도 하고 울며 웃기도 했을 것이다. 그 처량한 심정을 상상하면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도 그런 막막한 상황을 겪은 적이 있다. 내가 9살, 동생이 8살 무렵이던가, 그때만해도 혈기 왕성했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대차게 한 판 싸웠던 날의 기억이다.  


엄마는 어린 막냇동생을 껴안고 잠이 들었고, 내내 방에 처박혀 두려움에 떨던 나와 동생은 상의 끝에 거실 소파에 누워 잠든 아빠에게 우리의 이불을 덮어주기로 했다. 양복 차림 그대로 잠이 든 아빠는 우리가 슬며시 덮어준 이불 때문인지, 아니면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잠들지 못한 탓인지 어둠 속에서 이내 “아유 우리 딸들 진짜 착하다. 고마워. 그리고 아빠가 미안해”란 세상 다정한 치레(?)를 하셨는데, 과장된 말투며 몸짓이 어찌나 어색한지 어린 마음에도 평소답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다. 


어찌됐든 한결 풀린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내일이면 엄마랑 화해를 할지도 모른다는 안도감으로 잠이 들었다. 만일 두 분이 내일도 저렇게 싸운다면? 동생과 내가 매일 방에 숨어 귀를 막고 있어야 한다면? 엄마 아빠가 고함을 지르며 싸우는 동안, 나와 동생은 숨죽여 울며 이런 불안감을 키웠다.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쯤의 기억이지만 나는 지금도 그날 엄마의 차림새며 아빠의 한숨 소리가 귓가에 여전하다. 왜 그렇게 생생한가 생각하면 여러 번 복기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선다. 그날의 충격이 너무 커서 나는 노력하지 않고도 한번씩 두고두고 그 날을 떠올리며 곱씹게 됐는데 그러는 동안 10살도 됐고 스무살도 됐고 서른 살도 됐다. 


신기한 건 기억하는 상황이며 정황은 똑같은데 떠올려지는 시점마다 그 일을 다른 관점에서 다른 맛으로 음미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어릴 땐 그저 ‘엄마 아빠의 싸움’이던 단편적인 사실이 애 낳고 지지고 볶으며 사는 지금에 와서는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당시 30대 중후반이었던 부모님의 나이를 헤아리며 얼마나 너덜너덜하고 지긋지긋한 일들이 삶 군데군데 많았을까? 싶은 연민도 든다. 


이처럼 어린 시절의 특정한 경험, 사건이 잊혀지지 않아 한번씩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의미를 곱씹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나는 언제부턴가 애들이 애들로만 보이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순간은 지나가지만, 기억은 오래가기 때문에 어른이 되는 과정 틈틈이, 조근조근 그때의 의미를 곱씹게 될 까봐 조금은 두렵다. 나 역시 우리집 숟가락 개수까지 다 알고 지내는 엄마의 친구가 나를 떠 보기 위해 “너희 아빠 어느 대학 나왔어”하고 묻던 그 얼굴의 표정과 말투를 온전히 기억하고 있다. 


아빠는 고졸이었고, 그 점을 모를 리 없는 아줌마였지만 명문대를 졸업한 아줌마 남편의 졸업앨범을 구경하고 있던 10살의 나에게 얄궂게도, 아주 은밀히 그런 질문을 했었더랬다. 10살의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지만 15살쯤의 어느 날에는 아줌마의 속내를 어렴풋하게 읽었고, 20살 겨울 무렵에는 완전히 확신했다. 


그런 식으로 어린 시절 엄청 대단해 보이던 그 사람이 얼마나 보잘것없는 유형의 인간이었는지, 단순해 보이던 그 질문 속에 얼마나 많은 캐냄과 떠보기가 있었는지, 다른 한편으로는 재미 없고 지루했던 그 사람이 얼마나 단단한 사람이었는지 너무 선명히 깨달아지는 경험을 하고 보니 애들이 마냥 애들로만 보이지 않는다. 당장은 내 자식부터가 그렇다. 지금은 세상 전부인 엄마지만, 언젠가는 성인이 성인을, 여자가 여자를 가늠하듯 나를 생각해 보는 날이 오겠지 싶어 스스로 많이 검열해 보는 요즘이다. 


훗날 딸 아이는 상처가 여전한 방바닥을 내려다보며 엄마 아빠에 대해 어떤 식의 해석을 덧붙여갈까? 머리 굵은 자식만큼 어려운 대상이 없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퐁당 FONGDANG | studio-function (iwfn.co.kr)에 기고한 첫 글. 

한달에 한 편씩 적는 에세이. 

잠들어있던 기억을 깨워주는 고마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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