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무늘보 Apr 06. 2021

선택적 초라함

워킹맘의 둘째 출산기

8개월 만삭의 배를 움켜쥐고 회사를 나간다.

출근 전, 매일매일 옷장에 있는 모든 큰 옷들은  다 꺼내서 배 나온 것이 티 나지 않은 옷들을 찾는다. 물론, 회사에서 나의 임신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불러오는 배의 크기가 나의 얼마 남지 않은 업무 시간을 말하는 ‘시한폭탄’과 같이 느껴져 최대한 숨기고 싶을 뿐이다. 회사 사람들이 내 배를 보며, ‘야, 시한폭탄 곧 터지겠다!’라는 조급함보다는 ‘아, 아직 멀었네’라고 안심하기를 바란다. 아니, 오히려 나 자신이 아직 좀 남았다고 안심하기를 바라는지도 모른다.


대우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핸디캡이 되지 않기를...

회사에 임산부로서의 대우를 원했더라면, 이렇게 배부를 때까지 다니지도 않았다. 다른 대기업의 임산부 찬구들처럼 단축근무 등의 대우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시한폭탄 같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내 배가 내 커리어에 핸디캡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게 내가 먼 장거리 외근 길에도 오랜 대중교통 이용으로 호흡장애를 겪으면서도 마다하지 않고 가는 이유다. 임산부라는 이유로 하나씩 마다하다가는 그 자체가 내 커리어의 핸디캡이 될 것만 같아 그렇지 못하다. 드라마 ‘산후조리원’에 등장하는 워킹맘 ‘오헌진’은 극 중에서 양수가 터져 응급실에 실려가는 그날까지도 한 몸 사리지 않고 업무를 다한다. 양수가 이미 터져 줄줄 흐르는 순간에도 계약을 성사 사키고 손수 응급차를 부르는 하이힐 신은 만삭 임산부의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만 같아 함께 웃을 수 없었다.

다 알고 나만 모르는 사실(출처: 드라마  산후조리원)

위태위태하다.

장거리 외근도 마다하지 않고 현장 지원도 마다하지 않고 간다. 임산부라는 이유로 장거리 혹은 외근을 마다하기에는 팀에 모범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더 크다. ‘오헌진’처럼 만삭의 배에 하이힐을 신지는 못해도 미팅도 야근도 주말출근도 마다하지 않는다. 절대 ‘역시 여자는... 워킹맘은... 임산부는... 안돼...’라는 선입견을 만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시댁과의 모임에서는 절대 회사에서 힘들다는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럼 뱃속의 둘째를 위해서라도 당장 그만두라는 말이 나올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도 없는 외줄 타기를 오늘도 위태롭게 타고 있다.


최근 너무 힘들었다.

외롭게 버텨온 8개월이 무색할 정도로 최근 회사일로 힘든 일을 겪었다. 만삭을 향해 가고 있음에도 살은 일주일 만에 3킬로나 빠졌고, 매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에게 너무 미안한 시간이었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금 내가 힘들다고 주저앉는다면 지금까지 버텨온 나의 시간들과 노력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아이들이 되었다.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아이 둘의 엄마인데... 얘네를 앞으로 내가 잘 키우려면 이런 것쯤이야...’라는 마음으로 버티게 되었다. 어렸을 적, 워킹맘이었던 엄마가 ‘너희를 위해 서면 뭐든지 할 수 있다.’라고 하던 말들을 이제 내 나이가 되어 무슨 말인지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엄마가 걸어온 길을 걷고 있는 .

참 희한하게도 엄마는 나의 힘듦을 알아챘다. 안부를 묻는 짧은 통화에도 다 큰 딸의 힘듦을 바로 알아챘다. 그러곤, 괜찮냐며 물으셨다. 자세히 얘기하지 않아도 엄마는 그저 묵묵히 나를 위로해줬다.

본인이 걸어온 그 세월을 겪으며, 힘들어하는 딸을 안타까워하시면서..

엄마는 나에게 본인의 경험과 깨달음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말로 위로를 시작했다.

무너지며 초라해질 때는 한없이 초라해지는 갓도 하나의 방법이더라.”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렇게 무너지고 초라해지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초라해지는 것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조언이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이지만,  말이 나에겐 너무  위로가 되었다.

무너지고 초라해지는 순간을 생각하면, 숨이 턱턱 막히고 하염없이 눈물만 흐르던 순간이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두렵지 않게 되었다. 내가 선택적으로 초라해진다는 건 어쩔 수 없이 초라해지는 것과는 매우 다른 생각이었다. 더 이상 그 순간이 두려워지지 않았다. 엄마는 정말 본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깨달음을 그 시간을 똑같이 겪고 있는 딸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앞으로도 나는 이보다  힘든 순간들과 일들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도 나는 무조건 초라해지지 않으려 애쓰지만은 않을 것 같다.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언제든 나는 ‘초라해짐’을 선택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강하게 깨달았다.


지난 엄마의 시간이 지금 나의 힘듦에  빛에 되어 주는 순간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 나이, 6살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