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향인지 만리향인지, 봄의 꽃향기는 고통이었다
바람의 말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놓으리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버릴 거야.
꽃일 되어서 날아가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고3을 앞두고 학교를 옮겼다.
늘 다니던 곳, 늘 있던 곳, 그 도시를 계속 걷고 숨 쉬라는 것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가을에 떠나 겨울 동안 얼어있다가, 봄을 맞았다.
천리향이라 했다.
하교길, 바람에 실려 내게로 온 그 향이 신기해 코를 대고 있을 때 화분을 팔던 아주머니의 말씀. 처음 맡는 그 향이 신기해 나는 그 큰 화분을 사버렸다. 교복과 큰 화분이 담긴 검정 봉지. 토요일 오후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나는 처음으로 봄꽃이란 걸 느껴보았다.
나의 자유는 봄과 함께 왔다.
오랫동안 간호해 온 그녀를 떠나보내고 얻은 자유. 그토록 바라던 평온. 그러나 나의 자유는 내게 제 이름으로 곧이 오지 못했다. 나의 몸과 마음은 자유롭지 못했다. 자유로운 것은 그저 흐르던 대로 흘러가는 시간뿐이었다.
자유? 나는 더욱더 갇혔다. 아프고, 그립고, 괴롭고, 억울한 그 모든 것들과 눈물에 갇혔다. 내 몸을 떠나야 할 것들이 떠나질 못했다. 나의 감정과 말들과 생각들은 내 몸안에 차곡차곡 쌓이고 갇혔다.
'자유를 준다고? 감옥을 받았어.'
떠나간 그녀에 대한 그리움이 욕심이 되면 늘 그렇게 비꼬았다. 누구를 위한 단어 나부랭이냐, 모질게 따지곤 했다.
자유롭게 꽃향기를 맡던 그 순간, 겨우 그 몇 초뿐이었다. 꽃 향기에 입꼬리가 올라간 나 자신에 화가 났다. 도저히 있는 그대로의 향을 만끽해선 안될 것 같은 미안함이 나를 덮쳤다.
향이 좋아 덜컹 사들고 온 꽃을 화단에 심으며 그렇게 분노가 치밀었다. 향기가 좋다며 미소를 지었던 그 순간의 내가 정신 나간 멍청이 같았다. 진하고 진한 그 봄의 향기가, 나를 떠나 간 내 사랑을 대신해서 얻은 그 향기가, 나는 그렇게 아름다워 욕이 나왔다.
'너 혼자 봄이구나...'
천리향인지 만리향인지, 봄이 다 가는 동안 그 향기는 고통이었다. 그렇게 혼이 난 첫 자유의 봄 아니 형벌의 봄이었다. 자유가 아니어서 그 꽃나무는 그대로 두었다. 그때는 그렇게, 혼이 나야 마음이 편했다. 나 혼자 평화롭기엔, 한 망자의 마지막 봄이 너무도 슬펐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 봄이 또 온다. 비슷한 꽃 향이 여기저기. 바람이 실어 나르고 있다. 아직도 잊히지 않는 그 향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봄 한 구석이 불편하다. 어쩌면, 그녀가 내게 주려던 이쁜 향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저 갔으니 그동안 놓친 봄을 되찾으라고. 이제 저 갔으니 이 봄 향기로 그 자리를 채우라고.
그러나 그녀는 모른다. 육체적으로 자유롭지 못했던 그때였지만 나의 영혼은 그녀와 함께였던 그 봄들이 진짜 자유로운 봄들이었다는 것을.
꽃 향기를 전하려 열심히 달려오는 봄바람. 바람에 실려 그 고3 소녀도 온다. 이제 내가 맞는 것은 떠나간 그녀가 아니다. 그녀를 그리워하다 그 세월에 갇혀버린 한 소녀다. 그 소녀를 안아주기 위해 나의 봄은 그렇게 흘러간다. 바람과 함께. 꽃 향기와 함께.
[공대생의 심야서재. 신나게 글쓰기 2기. 미션 06. 시를 산문으로 바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