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무게를 버티며 집 장만을 하기까지
아기돼지 삼형제의 집
이전에 양학선 체조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 그간의 그의 노력과 함께 조명되었던 것은 그의 고향집이 비닐하우스 집이었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그 후에 집을 장만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 비닐하우스 집에 산다던 그 당시에도 가난이 부끄럽지 않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에게서 나는 반성과 죄책감에 휩싸였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나이 터울 적은 세 자매를 키우느라 심적, 경제적 부담이 컸음에도, 우리의 교육에 대해서는 아끼지 않으셨다. 우리를 키우느라 고생하셨고, 그렇기에 경제적으로 어려웠다는 걸 알면서도 누추한 집을 부끄러워했던 나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는 일은 생각도 하지 못했고, 다 커서도 주말에 집 가는 방향이 같아 차를 태워줬던 회사 동료에게도 차마 집을 보여주기가 부끄러워 근처가 집이라며 먼저 내리곤 했다.
특히나 어린 시절 비닐하우스에서의 생활은 지금까지도 주변 사람들에게 쉽게 말하지 못했다. 그래서 양학선 선수의 기사를 보았을 때, ‘비닐하우스 집’이라는 것이 우리 어릴 적 그 집 말고도 또 있다는 것에 놀랐고, 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그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비닐하우스 이후로도 방황하던 우리 집의 형태는 다양했다. 가게에 딸려있는 작은 단칸방, 상가 건물 내에 위치한 임대 방, 창고 내에 판넬로 만든 아지트.
비닐하우스 집
비닐하우스 안에 콘크리트로 바닥을 만들고 바깥을 겹겹이 쌓아 덮은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이지만 선명히 기억에 남는 하루가 있다. 하늘에서 비가 세차게 쏟아지며 홍수가 난 날이었다. 바닥은 온통 진흙탕 물이었고, 하늘도 흙탕물 같은 황토색으로 뒤덮였다. 집 안으로는 빗물이 계속 들이치고, 아버지는 수로를 뚫어야 한다며 밖으로 나가셨다. 어머니와 함께 바가지와 쓰레받기 등으로 물을 계속 퍼내면서 금방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를 걱정했다. 비를 멈출 생각이 없는 창 밖의 누런 하늘을 보면서 아버지를 걱정하고 기다리던 어머니와 세 딸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사진처럼 내 머릿속에 선명히 자리 잡고 있다.
사실 어릴 때는 그때의 생활에 대해서 크게 불만이 없었던 것 같다. 언니들과 집 앞 흙 밭에서 장난치며 놀던 그때는 내게 그 세상이 전부였다. 집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어땠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순수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아직 비교대상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단칸방 생활
내가 여섯 살 즈음에 부모님께서는 동네의 작은 가게에서 장사를 시작하셨다. 가게 뒤편으로 딸린 방이 하나 있어 우리는 비닐하우스 집에서 콘크리트 건물 방으로 이사를 했다. 주변에 이웃집이 없던 한적한 곳에서 시내로 이사를 가게 되어 기분이 한껏 들떠서 자랑하며 다니곤 했다. 신이 나서 교습학원 선생님에게 “제가 어떻게 이렇게 걸어서 왔게요~? 저도 이 동네로 이사 왔어요!”라고 말하던 게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하지만 우리가 점점 자라면서 다섯 식구가 방 하나에서 사는 데에는 불편함이 많아졌다. 청소년기가 되면서 부모님과, 언니들과 말다툼이 잦아졌다. 한바탕 말싸움 후에도 문 닫고 들어갈 내 방이 없으니,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거나 등을 돌리고 민망하고 어색한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가게에 오고 가는 손님들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밤에 공부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없기에 모두가 잠든 밤에 조용하게 공부하다 보면 집중이 잘 됐다. 언젠간 우리도 멋진 집에서 살 날을 꿈 꾸며 오기 섞인 마음으로 공부하다 보면 닭 울음소리와 함께 바깥이 밝아지는 새벽녘까지 공부를 했다.
이러저러한 불편함이 많다고는 해도, 우린 그 안에서 많은 추억을 쌓았다. 서로의 생활을 공유했기에 대화도 많이 했고, 감정도 돈독했다. 겨울밤, 뜨듯한 이불을 덮고 동그랗게 앉아 아이스크림 한통을 다 같이 퍼먹었다. 잠이 오지 않으면 불을 끈 후에도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그러다가 엄마나 아빠가 자다 깨서 ‘안 자냐’고 물으면, 혼날까 봐 서로 먼저 코 고는 소리를 내고 부스스 자다 일어난 척하며 말했다.
‘크르르렁! 으응..?! 언니 왜 안자?!’ ‘으음..? 난 자고 있는데? 00아 너 안 잤어?’
그러고는 키득거렸다.
교육 환경을 위한 셋방을 얻다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님은 우리가 공부에 집중할 수 있는 독립된 공간을 마련해 주고 싶어 월세 방을 따로 하나 얻으셨다. 1층짜리 상가 건물에 있는 임대 방이었는데, 낡긴 했어도 거실, 부엌, 방이 따로 분리되어 있다는 것에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비교적 큰 도시에서 교육받을 수 있도록 다른 지역의 고등학교로 진학했을 때에는 자취방을 구해 주셨다. 넓지는 않아도 도시의 깔끔한 원룸을 보고 우리는 ‘우리가 살았던 곳 중에 제일 좋은 것 같다!’며 기뻐했다.
독립된 집(?)이 생기다
제대로 된 집 마련은 큰 숙제처럼 항상 우리를 따라다녔다. 가게 방을 벗어나고자 창고 안에 판넬로 임시로 집 형태를 마련했다. 더위와 추위에 어찌나 약한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간 후에도 주말 또는 방학마다 집에 오면 한 여름에 푹푹 찌는 더위에 놀라곤 했다. 나는 기숙사에서 에어컨을 틀며 편하게 지내는데, 부모님은 고생하시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부모님은 이제 애들도 없으니 굳이 집이 클 필요가 없다며 만족하셨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겠는가. 세 자매의 대학 등록금 때문이었으리라.
오랜 숙원을 이룬 지금, 거실에 앉아 창 밖을 보다
예전 비닐하우스 집이 있던 그 자리에 새 집을 지었다.
우리 세 자매가 모두 직장을 다니게 되었고, 생활이 조금 안정되자 충분하진 않아도 집을 지을 여력이 생겼다. 우리는 그간의 설움과 상상 속에서 꿈꿔왔던 집의 모습을 떠올리며 가족회의를 통해 원하는 조건을 반영하여 집을 설계했다.
우리가 살아왔던 환경의 영향으로, 큰 언니는 어릴 적부터 집에 대한 로망과 함께 건축가를 꿈꾸었고, 이제는 건축 설계사가 되어 집을 짓는 데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다 지어진 집에 입주 후에 청소하는 것이 너무 즐거웠고, 어머니도, 아버지도, 언니들도, 나도 집으로 친구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대접했다. 집으로 친구를 초대한다는 건 이런 느낌이었구나.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에서 반지하에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생활모습에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 안에 비친 우리를 보았다. 유학시절, 내가 상하이로 가족들을 초대했을 때, 좋은 숙소를 잡고 쇼파 위에 편히 앉아 테이블 위의 간식을 먹으면서, 언니는 ‘앗, 우리 꼭 기생충에 나오는 가족들 같다’며 웃픈 농담을 하기도 했다. 우리가 이런 좋은 집에서 쉬고 있는 것이 너무 생소했기 때문이다.
아기돼지 삼형제의 집
시간이 지난 후에도, 집이라는 것이 우리에겐 아직도 생소하고 낯설었다. 각자의 방이 생기고 나서도 한동안은 다 같이 거실에서 자곤 했다. 실감이 나지 않는 우리는 문득문득 ‘우와 이러니까 진짜 가정집 같다!’라는 말을 했다. 거실에 모여서 과일을 먹으며 TV를 시청할 때, 자다 깨서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마실 때, 이 방 저 방 걸어 다닐 때, …
지금 생각해보니, ‘가정집 같다’는 표현은 드라마 속 모습을 상상하고 했던 말 같다. 사실 어떤 형태이든 간에 우리 집도 ‘가정집’은 가정집이었는데 말이다.
어느 날 어머니는 거실에 앉아 집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우리 집은 꼭 셋째 돼지네 집 같아, 그치?”
비닐하우스 집은 마치 첫째 돼지 집 같았고, 창고 방은 둘째 돼지 집 같았고, 이제 안정된 집은 마치 셋째 돼지네 집처럼 튼튼하고 안정적이라고.
집 안에서 유리창 밖을 보고 있노라면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우리의 모습이 떠올라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 비닐하우스 집에서 비 오는 날 물을 퍼내던 우리도 콘크리트 튼튼한 집에서 창 밖으로 비 오는 풍경을 보게 되다니.
또다시 생겨난 과제
이렇게 부모님의 ‘내 집 마련’은 오래 걸리긴 했으나 결국은 이뤄냈다. 이젠 내가 곧 집을 구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부모님이 겪었던 책임과 부담감이 이젠 내게 온 것이다. 왜 우리만 이렇게 사는 것 같지 하던 어릴 적의 원망이 이제는 그 당시 부모님의 막막한 심정이 이해되는 연민과 감탄으로 변했다. 농사를 짓고 시골의 작은 구멍가게를 운영하여 다섯 식구의 생활비와 세 자녀의 교육비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그 삶 속의 고뇌와 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 것만 같다.
그리고 그 막막함과 두려움은 이제 내 것이 되었다. 나는 과연 내 한 몸 살 집이라도 마련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못해낼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언젠간 좋은 날이 올 것임을 믿고, 오늘의 상황에 좌절하지 않으려고 한다. 단칸방에서 내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공부를 하는 것’이라는 문장으로 불투명한 미래에도 닭 울음소리 들려오는 새벽까지 공부하던 것처럼.
사는 데 급급하여 희망이나 꿈같은 건 나와는 먼 일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집에 대한 로망을 건축설계사라는 꿈으로 이룬 언니처럼.
그리고 무작정 미래만을 바라보고 현재를 잃고 싶지는 않다. 불행하다고 여겼던 단칸방에서도 웃음소리를 채워 넣었던 것처럼.
현재의 목표와 꿈이 ‘돈 버는 것’이어도 괜찮다. 어쨌든 어떠한 꿈을 가지고 우리는 살아가고 있으며,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 속에서도 행복한 추억은 여전히 쌓여간다.
어디선가 자신의 상황에 지쳐 있는 분이 있다면, 함께 힘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