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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진의 낮은숲 Mar 10. 2019

내가 결혼하려는 진짜 이유

[에세이 - 2]

때가 되면 저절로 하는 게 결혼이라고 생각했다. 스무 살부터 막연히 생각했다. 아니, 그보다 더 어린, 청소년 시절부터 생각한 듯싶다. 남자도 저절로 생기는 줄 알았다. 결혼할 때가 되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이상형 남자가 내 앞에 딱! 나타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멋지게 청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나랑 결혼할래?
yes

난 예스만 연습했다. 예스 예스 예스... 그렇다.  20년째 연습만 하고 있다. 아니지, 올해 나이가 41살이니까 20년이 넘은 건가? 빌어먹을! 왜 아무도 안 가르쳐 준거야. 에휴, 이제 와서 누굴 탓해. 다 고지식한 내 성격 탓인데... 난 까맣게 몰랐다. 사람마다 청혼하는 스타일이 다 다르다는 걸... '결혼할래?'라는 말만 청혼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 말이 아니면 그냥 농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어디 살고 싶냐는 물음에도, 아이는 몇이나 낳고 싶냐는 물음에도, 유학을 같이 가자는 말에도, 거창한 미래 포부를 말하더라도 난 몰랐다. 그게 결혼하자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 건지 미치게 몰랐다. 이런 건 그냥 친구나 회사 동료 하고도 할 수 있는 얘기 아닌가? 그도 그럴 것이 생각해보면 꼭 내 탓만은 아니다.


난 항상 전혀 뜻밖의 인물에게 무방비상태에서 기습적으로 청혼받았다. 단 둘이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을 때가 아니라, 그냥 회사에서 자판기 커피를 마시다가 난데없이, 아니면 집으로 걸어가는 길에, 영화를 보는 도중에, 밤늦게 갑자기 전화해서 농담처럼... 게다가 사귀는 사이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냥 가깝게 지내는 오랜 친구나 직장 동료, 학교 선배들이었다. 그러니 이게 청혼인지 뭔지 내가 알게 뭐람. 일 때문에 바빠 죽겠는데. 그래, 그 순간에 난 항상 머릿속에 걱정이란 돌덩어리를 이고 살았다. 원고 쓸 걱정, 구성안 쓸 걱정, 아이템 찾을 걱정, 사례자 섭외할 걱정... 영혼 속까지 이런 생각들로 꽉 차 있을 시기였다. 맞다. 타이밍이 안 좋았다.


뭔가 억울한 생각도 든다. 나 같은 둔녀에게 섬세한 센스를 기대하다니... 예전에 한 기자가 내게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이 여자는 둔해서 몰라. '결혼하자'라고 말을 해야지 알걸


그때도 몰랐다. 이게 정식으로 사귀어보자는 말인 줄... 그냥 내가 곰처럼 둔하다고 타박하는 줄만 알았다.




결혼을 안 하는 건가. 못 하는 건가. 비록 한 글자 다르지만 둘의 차이는 엄청 크다. 남들은 내가 '안 하는' 거라고 말하지만, 사실 난 '못 하는' 거다. 마흔 살이 넘었는데 결혼은커녕 애인 조차 없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과거에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대략 난감이다. 난 성직자도 아닌데 왜 그런가.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주변의 반응은 거의 다 비슷하다.


그거 왜 하려고? 그냥 혼자 살아. 나 같으면 혼자 살겠다.
결혼하면 지지고 볶고 얼마나 싸우고 힘든데.....


그래서 니들은 결혼했냐? 웃으며 청첩장 돌리고 웨딩 사진 찍었으면서 나 보고는 하지 말라네. 물론 결혼하면 힘든 일도 많겠지. 당연하잖아. 주변에 사람이 더 는 건데. 는 만큼 스트레스 더 받겠지. 안 그래? 그래도 그 속에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동과 기쁨, 환희와 행복도 있잖아. 무엇보다 누군가의 '엄마'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멋진 기회는 결혼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거 아닌가?       


이쯤 되면 누구나 자연스레 찾는 곳이 있다. 나도 알고 너도 아는 곳. 그래, 점집이다! 용하다고 소문난 역술인을 - 무당은 아니다. 대부분 명리학을 오래 공부한 분들을 -  찾아갔다. 마흔 살이 넘으면 질문도 바뀐다. 예전에는 '저 결혼 언제 해요?'였지만, 지금은 '결혼을 할 수 있을까요?' 다. 이게 무슨 망극한 질문이란 말인가. 어찌 됐건 대부분의 역술인들은 '늦더라도 결혼은 할 수 있다'라고 풀이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하는 말은 이렇다.


결혼하면 아주 잘 사는데... 남편 자리에도 능력 있고 머리 좋고 잘생긴 남자가
들어와 있어. 자식도 낳으면 대성하네, 천재야, 천재!!
아아... 정말요?
에헤~ 그런데 결혼하기가 힘든 팔자 구만.
네? 결혼한다면서요??
결혼은 하는데 결혼식 올리기까지가 힘들어.
왜요... 왜요??
본인은 눈에 콩깍지가 씌는 스타일이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콩깍지 때문에
결혼하고, 결혼한 다음에 그게 벗겨져서 실망하는 거거든.
에? 그럼 전 어떡해요?
만나자마자 결혼해. 한 달 안으로. 그 방법밖에 없어.
아니, 사람도 파악 안 하고 결혼해요? 그런 결혼이 행복해요? 잘 살아요?
잘 살지. 아주 잘 살아. 남들은 연애한 다음에 결혼하지만
본인은 결혼한 다음에 연애하는 거야. 얼마나 좋아, 걱정하지 마

이런 팔자도 있나.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다른 역술인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혼자 살지는 않는다고 했다. 아무튼 난 대단한 비책이라도 받은 양 '한 달 안에 결혼 하자'를 외우고 다녔다. 나타나기만 해라. 그런데 이게 뭐야? 나타난 사람들마다 얼굴이 왜 그래? 나 외모 보는 거 몰라? 꽃중년은 아니더라도 호감은 있어야지, 손잡고 싶을 만큼은 생겨줘야지, 안 그래? 한 달은 너무 길다. 마흔 살이 넘으면 안다. 보는 순간 안다. 내 사람인지 아닌지. 나와 맞는지 안 맞는지. 나이는 괜히 먹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코, 이야기를 하다 보니 판이 너무 커졌다. 더 늦기 전에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사실 난 결혼에 그다지 관심이 많은 사람은 아니다. 입으로만 결혼해야지 해야지, 떠들고 다닐 뿐 마음속으로는 늘 거꾸로 가고 있었다. 결혼하면 힘들 텐데, 아침에 남편 밥도 차려주려면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요리도 잘 못하고. 방송 일 하면서 살림을 어떻게 하지? 청소며 빨래며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며 시댁 식구들까지 챙기려면, 으으으.... 나같이 게으른 여자가 과연? 또 만나는 남자들마다 김치에 대한 열망은 어찌나 크던지, 사 먹는 김치는 시원한 맛이 없다나 뭐라나, 그러면서 김치 담가 먹냐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물어보는데 이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무엇보다 결혼이 두려운 이유는 방귀다. 방귀는 나올 때마다 바로바로 뀌는 게 장 건강에 좋다. 정신 건강은 말할 것도 없다. 참아 본 사람은 안다. 장이 꼬이고 머리가 띵한 고통을. 그런데 결혼하면 어쩌지? 남편 앞에서 빵! 뀔 수도 없고, 조금 참다가 화장실 가서 볼일 보는 척 뀔 수도 있지만 이 짓을 평생 할 걸 생각하면 끔찍하다. 남녀 사이에 방귀 트는 순간 모든 환상이 다 깨진다고 했던가. 대학 시절 한 선배는 여자가 두루마리 화장지를 들고 화장실에 가는 것만 봐도 환상이 깨진다고 했다. 여자는 이슬만 먹고사는 거 아냐?라고 했다. 농담처럼 말했지만 아마 90% 이상 진심이었을 게다. 남자들의 몹쓸 환상이란 쯧... 결혼한 친구나 후배들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물어봤다. 한 후배가 말하길, 그냥 시원하게 방귀 뀌고 남편한테 말한단다. '너도 꿔'...  아, 이게 뭐란 말인가. 인심 쓰듯 한마디 던져주면 될 일인가. 렇게 쉬운 일이었나. 애석하게도 내겐 아니었다. 다른 부부들은 사정이 어떤지 갑자기 궁금하다. 아무튼 결혼은 '내게 너무 먼 당신'과도 같다.   


가장 큰 문제는 이거다. 바로 결혼하고 싶은 남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거. 그러니 결혼에 대해 관심도가 떨어질 수밖에. 남자 보는 눈도 까다로워서 - 눈이 높다는 얘기가 아니다. 조건을 보고 만나진 않는다. 느낌을 본다 - 쉽게 연애도 못했다. 핀잔도 많이 들었다. 뭐 그리 대단한 여자도 아니면서 튕긴다고. 그 덕분에 첫사랑도 남들보다 훨씬 늦은 26살에 했다. 남자 때문에 안절부절못했던 시절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만큼 좋아했지만 결혼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왜? 일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방송작가 3년 차. 한창 일할 때였다. 방송작가로 더 성장하기 위해서는 주말까지 반납하면서 일해야만 했다. 그런데 결혼이라니...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은데 이대로 그만두고 싶진 않았다. 지금은 17년 차. 난 어떻게 됐을까... 세월이 이만큼이나 흘렀지만 소위 말해서 난 성공하지 못했다. 당연히 유명하지도 않다. 여전히 이름 없는 작가로 근근이 생활고에 시달리며 살아가고 있다. 요즘처럼 힘들고 지칠 때는 그냥 그때 결혼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본 건 아니다. 그러나 대답은 역시, 고집스럽게도 바뀌지 않았다. 이후에도 소개팅을 여러 번 했다. 근사한 남자들도 많이 만났다. 하지만 난 늘 남자보다 일을 먼저 선택했다. 주말에 데이트가 있더라도 일이 생기면 데이트를 미루고 방송국으로 출근했다.


슬프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외롭지 않다면 그 또한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조건을 적당히 맞춰가면서, 내 몸과 마음을 구겨가면서 결혼이란 제도에 얽매이고 싶진 않았다. 그렇다. 39살까지는 그랬다. 정확히는 39살 여름까지는 그랬다. 도대체 그해 여름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내가 결혼해야겠다고 결심한 건, 그것도 마흔 살이 다 돼서 뒤늦게 결심한 이유에엄마가 있다. 2년 전 엄마는 내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여자로서의 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내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한쪽 가슴을 전부 도려냈기 때문이다. 불행 중 다행은 0기 판정을 받아서 항암 치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당시 엄마는 동생과 함께 중국 칭다오에 살았는데 병시중을 들기 위해 간단한 짐만 챙겨서 부랴부랴 서울로 왔다. 엄마는 나를 보고 울진 않았다. 하지만 깊은 절망이 느껴졌다. 엄마는 침울했고 웃음을 잃었다. 왜 지금까지 당신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지 한탄했다. 당신 때문에 자식이 아픈 게 아닌가 자책도 했다. 엄마는 밥을 먹다가도 멍하니 앉아있었고 하염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새벽 2,3시가 지나도록 잠이 안 온다며 묵주 알을 굴렸다. 10여 년 전 우리 집이 망해서 빚잔치를 했을 때보다 엄마는 더 어두웠다. 한동안 그랬다.


그때부터 나는 엄마에게 '희망'이 되기로 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꿈을 하나씩 하나씩 줬다. 일종의 공약처럼.


엄마, 내년엔 방 두 칸짜리 전셋집에서 살자
엄마, 내년엔 차를 사자. 그래서 예삐(13살 요크셔테리어)랑 같이 여행 다니자
엄마, 돈 모아서 해외여행도 가자. 로마에서 성지순례하고 싶다 했잖아


엄마는 나와 함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돈도 들지 않으니까 더 신났다. 눈만 감으면 됐다. 상상의 나래를 폈다. 벌써 로마에 가 있는 듯 들떴다. 나 때문에 인생에 소소한 즐거움을 잃어버린 엄마에게 다시 희망을, 다시 기쁨을, 다시 행복을 줄 수 있다면... 속으로 수천 번 다짐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지난겨울, 수술 부위가 다 아물어 갈 때쯤 엄마가 말했다.


은주야, 너도 이제 결혼해야지


뜻밖의 한 마디였다. 엄마가 나보고 결혼하라니... 많이 놀랐다. 사실 엄마는 지금까지 나한테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고 늘 말했다. 여자가 능력 있으면 혼자 살아도 된다고 했다. 집안에 맞선 자리가 들어와도 '은주는 아직 결혼할 때가 안 됐다'며 내 의사도 묻지 않고 중간에 끊어버렸다. 당신은 다시 태어나면 혼자 살 거라고 누누이 말했다. 그만큼 엄마에게 결혼은 상처고 고생이었다. 그랬던 엄마가 나보고 결혼하라니 놀랄 수밖에....


난 자신 없었다. 이번엔 건강 때문이다. 몸이 완전하지 않다는 게 삶의 질을 얼마나 떨어뜨리는지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41살. 꽃다운 나이도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 대한민국에 내 컨디션을 이해하고 받아줄 만큼 희생정신이 투철한 남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쩌지? 이건 오로지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난 결심했다. 노력해보기로. 왜? 난 엄마의 '희망'이니까. 가슴 재건수술이 모두 끝나면 다시 남자를 만나야지. 일단 나도 멀쩡해야 되니까. 안 그래? 시간이 어서어서 흐르길 기도했다. 그리고 드디어 지난 2012년 8월, 나는 모든 재건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우하핫!! 이젠 정말 엄마 소원을 들어줄 차례인가. 그래 누구든 딱 걸리기만 해 봐라. 평생 존경하며 살 테니...



p.s. 이 글을 쓴 지 7년이 지났다. 하지만 난 아직도 혼자다. 역시 결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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