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와 마당
가을이 깊었는데도 봄날 같이 따뜻하더니 어제는 종일 비바람이 몰아쳤다. 바람을 탄 빗방울은 데크 깊숙이 적시고 마당의 풍경은 쉬지 않고 댕, 댕 흔들리는 소리를 내었다. 아침에 나가보니 바바람에 마로니에와 목련의 커다란 잎들이 마당에 가득 떨어져 있다. 아침 해가 마당에 들 무렵 커다란 빗자루를 들고 낙엽을 쓸어 모았다.
마당을 쓰는 것은 참 오랜만이다. 실내에서 진공 청소기만 끌던 내가 찬찬히 살피며 마당을 쓴다. 어제처럼 비가 오고 난 뒤 아침에는 괜스레 앞마당 뒷마당을 한바퀴 돌아보며 살피게 된다. 마당을 눈으로 확인하려는 듯이.
마당을 쓸며 살피며 마당을 기억한다. 일곱 살 무렵 겨울, 나는 둘째 동생을 포대기로 업고 우리집 마당에서 친구들과 얘기하고 있다. 또래의 친구들 등에도 동생이 업혀 있기는 마찬가지이다. 당시만 해도 일곱 여덟 살 쯤이면 으레 동생을 업는 경험을 하게 되고, 우리 엄마도 매번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동생 업고 나가라”는 말을 했다. 더 뚜렷이 남은 기억은 동생을 업은 나를 거울에 비춰 보며 ‘이 정도면(동생을 업을 수도 있으니) 학교 갈 수 있겠지’ 하며 초등학고 입학을 기대하던 일이다.
일곱 살 무렵 동네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았다. 유치원이란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던 산골의 일곱 살 아이는 매일 동네 친구들과 산과 들로 놀러 다녔다. 바로 아래 동생은 다섯 살, 내가 놀러 나갈 때 마다 따라 붙었다.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는 언제나 두 살 적은 동생과 함께였다. 동생이 따라 나오는 것에 나는 그러려니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느 날 매일 어울려 놀던 친구가 폭탄 발언을 했다. “니 동생 데리고 나오면 안 놀거다” 정말 뒤통수를 탁 치는 폭탄 선언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친구랑 노는 것이 제일 좋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부터는 동생과 눈칫싸움이 시작됐다. 아니 싸움이라기보다는 내가 동생 눈치를 살핀 것이다. 동생을 따돌리고 혼자만 나가 그 친구랑 놀고 싶어서, 그래야 그 친구가 놀아준댔으니. 지금 생각해도 바로 아래 동생은 아버지 엄마가 같고 얼굴이 좀 닮았다는 것 빼고는 비슷한 것이 하나도 없다. 흔히 말하는 기질이라는 것이 정 반대이다. 요즘도 가끔 그것이 동물이든 무서운 것이든 더러운 것이든, 떼내려고 해도 달라붙곤 해서 아주 무섭고 지치는 꿈을 꾼다. 동생은 나와 달리 눈치도 빠르고 판단도 빨랐다. 어찌어찌 해서 방을 빠져나와 마당 끝 변소까지 가는데 성공했다. 이제 대문만 나가면 된다고 생각할 즈음 동생은 언제나 변소 뒤에서 탁! 나타났다. “혼자 놀러 갈라고 그랬지?” 언니지만 나는 동생을 이겨먹지 못했다. 동생 데리고 오면 안 놀아준다는 친구의 단호한 말이 떠오르고 결국 나는 동생에게 발각되어 놀러 나가는 것을 포기한다.
그때는 친구와 놀고만 싶었고, 따라붙은 동생이 버거웠고, 동생 데리고 나가라는 엄마의 말이 힘들었다. 일곱 살 나는 동네 친구와 놀로 싶어서 눈치 빠르고 어찌해서든 따라붙던 동생이 버거웠지만 나이 들면서도 상황만 달랐지 그런 감정은 내내 이어졌다. 집 전화만 있던 시절, 각자 따로 살면서도 전화했다가 내가 어쩌다 외출 나간 것을 알면 다시 전화해서 ‘어디 갔었나’를 알아야 직성이 풀리는 동생이었다. 그래서 어른이 된 다음에야 일곱 살 때 친구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런 동생이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언제나 나는 판단이 느리다. 아니 나는 내가 힘들다는 것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선명히 판단하고 인식할 때면 이미 그들은 그 일을 잊은 뒤여서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마당을 쓸며 마당을 기억한다. 열 살까지 살았던 어린 시절의 그 넓은 마당에서 나는 자유로웠던가. 내겅이 된지 채 두 달이 못된 이 마당은 나를 자유롭게 해 줄 것인가. 이제야 마당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더이상 언니이지 않기로 마음 먹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