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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욘킴 Nov 03. 2024

취향탐구: 고양이(드루)

드루가 고양이라서 좋은 것이 아니라 드루라서 좋은 것이다.

녹색 겨울 이불을 좋아하는 드루

나는 10년 남짓 한 마리의 러시안 블루 고양이(이름: 드루)와 함께 지내고 있다. 한 마리의 고양이를 진득이 키우다 보면 고양이라는 특성이나 러시안 블루라는 품종 보다는, 10년의 시간 동안 함께 호흡하며 일상을 나눈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의미가 더 커진다.


반려동물은 인간의 삶과 생활습관에 많은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강아지와 함께하면 규칙적인 산책 루틴이 생기고 미끄럼 방지 매트를 곳곳에 깔아 두게 된다. 말을 따라하는 앵무새와 살면 험한 말을 배울까 봐 말조심을 하게 되고, 토끼를 키우면 전선을 갉아먹지 않도록 꼭꼭 숨겨둔다. 화초를 키우는 집에서는 실내 온습도 조절과 환기에 더욱 신경 쓰게 된다.


나에게도 드루로 인해 생긴 버릇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문을 닫을 때면 항상 뒤를 돌아본다. 대문, 현관 중문, 방문, 화장실 문. 소리 없이 뒤따라오는 고양이가 문에 끼이거나 앞발을 들이밀다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문을 열 때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대문은 더 조심스러운데, 무신경하게 빨래를 널고 들어오면 밖에서 신나게 돌아다니고 있는 드루를 발견할 수 있다.


바퀴 달린 의자를 움직일 때는 드루의 기다란 꼬리가 깔리진 않을까 주변을 먼저 살핀다. 옷장이나 서랍을 닫을 때는 스웨터 더미 속에서 잠든 드루가 갇히지 않도록 한번 더 확인한다. 집 안에서 갑작스럽게 고양이가 실종되면 보통 옷장이나 서랍장을 뒤지면 나오는 것이 예삿일이다. 침대에 앉을 때도 이불이 불룩하면 툭툭 두들겨 보곤 한다. 이불 속에서 자고 있는 드루를 아무 생각 없이 몇 번 깔고 앉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앗,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뭐야, 어디 있어?"


두 가지 상황을 10년간 겪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조심성 많은 사람이 되었다. 고양이는 조심성이 많다는데, 이쯤 되면 인간은 모든 것을 조심하지만 고양이가 조심하는 것은 자신의 안위뿐인게 분명하다. 자기 좋을대로만 지내기 때문에 인간이 알아서 조심해주지 않으면 어디 끼어있거나 갇히거나 엉덩이 밑에 깔리고, 괜히 야옹 하고 인간에게 역정을 낸다.


고양이의 언어와 몸짓을 읽는 능력도 생겼다. 예를 들어 드루가 냉장고나 신발장 아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으면 곧장 초강력 살충제로 손을 뻗는다. 그 행동의 의미를 몰랐을 땐 커다란 벌레를 아무런 마음의 준비 없이 맞닥뜨린 적이 몇 번 있기 때문이다. 평소 반쯤 감긴 눈으로 지내는 고양이가 동그란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한다면, 그건 세스코도 한 수 접고 들어갈 백발백중의 벌레 탐지 신호다.


다만 한 가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면 드루는 벌레 탐지엔 능하지만 사냥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마치 형사물에서 시크한 프로파일러가 범인을 찾아내면 강력계 형사가 뛰어다니며 검거하는 것처럼, 예민한 감각으로 벌레를 발견하는 멋진 파트는 고양이의 몫이지만 몸싸움과 뒤처리라는 지저분한 일은 인간의 몫이다.


고양이의 언어도 이제는 꽤 이해할 수 있다. '야옹-'은 배고파, '야아옹-'은 화장실 치워줘, '애오오옹-'은 밖에 나가거나 놀자고 조르는 것이다.


부르면 돌아오는 대답의 미묘한 차이도 알아챈다. 거실을 어슬렁대며 지나가는 드루를 부르면 '우웅' 하고 대답하지만, 자고  있는 걸 깨우면 '꾸르륵?' 하고 오히려 되묻는다. '우웅'은 "응", '꾸르륵?'은 "응? 뭐?"라는 뉘앙스인 것이다.


집에 방문하는 사람들의 1차 검증을 고양이에게 맡기기도 한다. 드루는 10년 동안 꽤 많은 낯선 만남을 가졌다. 집주인, 정수기 점검 아주머니, 인터넷 수리기사님, 우체부 아저씨, 쿠팡 아저씨, 배민 아저씨 등등. 다행히 낯가림이 별로 없는 고양이라, 낯선 사람이 찾아와도 숨거나 덤비지 않는다.


특히 드루는 정수기 점검 아주머니의 가방과 인터넷 수리기사님의 도구 상자를 좋아한다. 정수기 계약 서류가 담긴 가방 냄새를 열심히 맡고, 각종 케이블과 연장이 담긴 도구 상자를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듯이 구경한다. 어떤 게 드루의 흥미를 끄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정수기 필터 교체요~", "KT 요~" 하는 소리만 나면 드루가 먼저 버선발로 뛰어나가기 때문에 정수기 점검 아주머니와 인터넷 수리기사님은 1차 검증을 통과한 방문객이라 할 수 있다.


또 드루는, 배달 오는 물건이 무엇인지보다는 누가 배달을 오는지에 관심이 많다. 비대면 배달로 피자를 시키면 드루는 쿨쿨 잠만 잔다. 하지만 어쩌다 현장 결제로 배달을 시키면 계산을 하는 동안 조금 열린 문 틈에 앉아 피자 배달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다. 격하게 환영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도미노, 파파존스, bhc 치킨은 일단 통과인 것 같다.


반면 집주인의 방문은 애매하다. 한 번은 이전 월셋집에서 고장 난 보일러 수리 건으로 집주인이 잠시 방문했었는데, 좋은 사람이었고 고양이도 허락해 주었다. 다만 집의 크고 작은 하자에 '아는 업자'를 앞세워 후려치는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한 번에 고칠 것을 두  번, 세 번 손 보게 만드는 구석이 있어 보일러 문제만큼은 단호히 조율하는 중이었다. 다행히 보일러는 교체하기로 마무리되었고,  인사를 나눈 뒤 나가려던 집주인이 말했다.


- 이 집 고양이는 참 울지도 않고 얌전하네.


뒤를 돌아보니 드루가 멀찌감치 서서 험상궂은 표정으로 집주인을 노려보고 있었다. 고양이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집주인은 고양이가 예의 바르다며 칭찬하고 나갔다. 드루는 그 후로도 현관 주변을 한참 경계하더니, 다시 심드렁한 표정으로 침대에 누웠다. 우리는 드루가 보일러를 바꾸는 데 나름대로의 힘을 보태고 있던 게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집주인의 안건이 뭐냐에 따라 드루에게 환영받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 같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일상의 자잘한 에피소드에 고양이가 녹아있다 보니, 드루도 인간과의 일상을 나름의 방식으로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를테면 아침에 눈을 뜨면 옆자리에서 느긋하게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라던지, 출근 준비로 분주한 와중에도 부드럽게 다가와 발치를 스치는 순간이라던지, 환기를 하느라 열어놓은 창문 커튼 아래로 삐쭉 나와있는 꼬리를 발견할 때가 그렇다.



꼬리를  살랑이며 창문 너머를 구경 중인 드루를 보면, 저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옆에 앉아 창밖을 보며 함께 시간을 보낸다. 고양이 드루는 혼자서 담벼락의 참새에 몰두하고 있을 뿐인데 나만 인간의 감상으로 드루와의 시간을 보내는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언가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드루가 나와 함께하는 방식은 그저 존재로서 충분하다. 말없이 곁을 내주거나, 다가와 옆에 앉거나, 가끔씩 내 주변을 맴돌며 자신의  방식으로 나를 지켜보는 그 모습에서 나는 위로를 받는다. 우리가 특별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일을 함께하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삶의 공백이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 고양이 드루와의 일상은 그런 작은 순간들의 연속이다.


드루가 강아지였어도, 햄스터였어도, 미어캣이었어도 좋았을 것 같다. 드루가 고양이라서 좋은 것이 아니라 드루라서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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