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나쁜 기억이라면 더욱요
나쁜 기억은 쉽사리 잊히지 않습니다. 어떤 기억이냐 하면, 예를 들면 이불을 차버리고 싶은 기억, 남에게 또는 자신에게 부끄러웠던 기억들입니다. 영혼을 속이고 가치 없는 것을 취했던, 텅 빈 것에 온 마음을 쏟았던, 손 안에서 모래처럼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들을 움켜쥐려던 기억, 끝난 인연에 매달리던, 오지 않는 내일을 기다리던 헛된 믿음, 후회, 상처, 자책, 수치심. 그런 것들은 머릿속 한쪽 구석에 깊게 뿌리내린 종양처럼, 떼어지지 않습니다. 혼자 밥을 먹을 때 체기를 일으키고, 눈이 흐려지도록 멍해지는 망상을 보여주고, 신발 안쪽의 정체 모를 돌조각처럼 거슬립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일들은 더욱 적어집니다. 특히 나쁜 기억이라면 더욱요. 하지만 나쁜 기억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주기적으로 백업이라도 되는 걸까요? 잊을만하면 되살아나고, 또 되살아납니다.
일상의 에피소드가 주기적으로 백업까지 되는 아-주 나쁜 기억으로 흑화 하려면 여러 가지 기질이 필요합니다. 소심함, 뒤끝 있음, 쓸데없이 진지함, 내성적임,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미리 걱정함, 예민함 같은 것들 말이죠. 안타깝게도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고루 갖춘 같은 사람입니다. 나쁜 기억은 쉽게 만들어지고, 잊히지도 않다 보니 기억하려는 노력의 총량이 자꾸만 줄어듭니다.
현실에서 나쁜 기억이 자꾸 되살아나면 꿈에서도 나타나고, 그 꿈이 다시 현실의 기억으로 업데이트됩니다. 행복했던 기억들은 점점 더 신기루 같아지고, 나쁜 기억이 나쁜 꿈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은 끔찍한 불면증을 낳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이 밝았습니다. 오래된 배관 냄새가 나는 찬 수돗물로 세수를 하고 전 날의 기억을 조금 되짚어봅니다. 두 달쯤 전부터 수면제의 도움을 받고 있는데, 전 날의 기억이 약간 흐릿해지는 문제가 있거든요. 저녁으로 무엇을 먹었는지, 누구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었는지, 그것들이 모두 실제로 일어난 일은 맞는지 꿈이었던 것은 아닌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기억 착오는 수면제의 흔한 부작용이라고 하더군요. 흔한 부작용 치고는 좀 위험한 것 같지만요. 스틸녹스 1정과 트리티코 1정, 둘 중 어느 녀석이 부작용의 범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약을 먹기 전엔 되도록 꼭 기억해야만 하는 대화를 피하려 합니다. 특히 약속을 잡는다던지, 뭔가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것들 말이죠. 기억이 나지 않는 것도 문제이지만, 뒤죽박죽 되는 경우가 더 곤란하거든요.
- 어제 네가 그렇게 한다고 했잖아.
- 나 그런 말 한 적 없어.
- 아니, 네가 그렇게 말했다니까? 그래서 내가...
- 아니라니까! 억지 좀 부리지 마. 끊어.
아, 지우고 싶은 기억이 하나 더 추가되었군요.
현대의학의 도움으로 불면증과 나쁜 꿈으로부터는 벗어나는 중이지만, 결국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깨어있는 동안의 시간입니다. 항불안제, 항우울제와 함께 추가로 내려진 의사 선생님의 지시사항은 하나같이 까다로운 것들입니다. 하루 두 번 약을 드세요, 커피를 줄이세요, 일을 줄이세요, 해가 있는 시간에 산책을 하세요.
점심시간을 이용해 산책을 하고, 눈물을 머금은 채 단골 커피숍을 지나치고, 몽롱한 약기운과 사투를 벌이며 조금도 줄어들지 않은 일을 합니다. 퇴근을 하면 다시 산책을 하며 오디오북으로 금강경을 듣습니다. 내려놓으라는 말, 내려놓으려는 마음까지도 내려놓으라는 말의 참뜻을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더 내려놔야겠단 생각을 하면서 걷습니다. 밤이 될 때까지 글을 쓰고, 수면제를 먹고 넷플릭스 대신 천장을 뚫어져라 보면서 하루의 기억을 되짚어봅니다. 드문드문 필름이 끊긴 것 같은 하루였습니다. 문득, 종말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습니다만,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리고 에피소드도, 기억도, 꿈도 없는 아침을 맞았습니다. 일상을 되찾은 걸까요?
어느 날, 오랜만에 마주친 회사 동료가 말합니다. 오늘따라 편안해 보이세요. 나는 속으로 답합니다.
기억의 총량이 줄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