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마음 살림으론 서로의 하루를 보듬어줄 수 없을 테니까요
사람 대신 대답하는 기계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 남지 않은 궁핍한 마음 살림으론 서로의 하루를 보듬어줄 수 없을 테니까요. 오늘도 별일 없었냐 묻고, 별일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올 것입니다. 사실 별일 없는 날은 드물지만, 말한들 별일 없던 날이 되는 것이 아니니까요.
밤을 꼬박 지새워도 모자라던 단어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갈수록 지킬 수 없는 약속이 많아졌다는 것을, 아니 약속조차 꺼리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함께라고 가정하던 많은 미래에서 서로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는 것도요. 현실에 마음을 저당 잡히는 날들이 많아지며 쌓여간 빚 때문입니다. 종국엔 서로 나눌 수 있는 마음이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토록 신비롭고 불가사의하던 감정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허함만 남기고 홀연히 청산된 것입니다. 끝나버린 것입니다.
달라지는 건 없단 결론으로 마음의 무게추가 점점 기웁니다. 기울어진 마음으로 줄줄이 꺼내 놓는 말들은 진심과는 거리가 멀고, 안중에도 없는 말들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바닥난 마음으로 쓰러지듯 수화기를 내려놓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받지 않아 줘서 다행이란 생각을 합니다.
인연이란 건 어디가 시작이었고 어디가 끝이었을까요? 그리고 어디에서부터 놓친 것일까요? 예고 없이 찾아왔고, 어느 날 모래 날리듯 사라졌습니다. 사라진 감정의 흔적을 애써 기웃거려 보아도 전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이쯤 되면 의심이 듭니다. 온전한 마음이기는 했던 걸까요? 하지만 모든 답을 안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질까요. 의미를 잃어버린 궁금증들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맴돌며 답을 삼킵니다. 삼켜도, 삼켜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에 종일 허기가 가시지 않습니다. 허기로 잠을 설쳤습니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요.
가장 거슬리는 것은 그리움도, 외로움도 아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흘러가는 시간입니다. 며칠이 지나자 필요하면 남에게 능숙하게 이죽거리고, 배가 고프면 먹고, 갈증이 나면 마시며 다시 하루가 잘도 살아집니다. 마음 한 구석이 조금 답답한 느낌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엉엉 울고 싶다던지, 사는 것의 어깃장에 대해서 누구든 붙들고 괴롭다고 호소하고 싶다던지 그런 마음은 들지 않습니다. 그저 잠깐, 잠깐씩 멍해지는 순간이 찾아올 뿐이고, 그마저도 밥알을 우물거리고 커피를 홀짝거리다 보면 퍼뜩 정신이 듭니다. 상실이 현실에 주는 영향은 그런 식입니다.
"함께 이루고 싶은 미래를 포기하고, 나 자신마저도 포기한 채 그저 견디는 이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다는 말인가?" -<김혜나 소설집 깊은숨: 레드벨벳>을 읽으며 다시금,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에 힘을 싣습니다.
희망을 믿지 않는 둘 보단, 믿으며 사는 혼자가 났습니다. 서로의 불안을 전염병 다루듯 하는 둘 보단, 가장 밑바닥의 감정마저 끌어안는 혼자가 났습니다. 같은 바다를 보면서도 다른 모험을 상상하는 둘 보단, 쏟아지는 별을, 핑크빛 석양을 보며, 겨울 첫 눈송이가 얼굴에 닿는 순간에도 같은 감정을 나눌 수 없는 둘 보단, 혼자가 났습니다.